시민들 국제사회 탄원서 제출·학술토론회 개최등 홍보 강화<br>"100년 시효설 근거없어… 영유권 입증 논리·자료 확보해야"<br>"우리 권리 지키면서 中과 관계악화 막는 절묘한 외교력 필요"
| ※위 지도는 넓은 의미의 간도(間島) 영역을 표시한 것이며, 일부에서는 동간도와 북간도를 동일한 지역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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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4일은 지난 1909년 청-일 간도(間島)협약이 맺어진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국내에서는 이를 앞두고 민간 차원에서 국제사회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간도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1일 간도되찾기운동본부 육락현 대표는 "'간도의 날(9월 4일)'에 맞춰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당도할 수 있게끔 간도에 대한 우리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탄원서를 발송했다"며 "정부 차원의 국제 소송이 어렵다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라도 간도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운동본부는 탄원서 접수와 더불어 '간도의 날'에 학술토론회 및 기념행사를 통해 시민들에 간도 관련 홍보 작업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앞서 지난달 29일 이명수 자유선진당 의원 등 50명의 의원들은 서명을 통해 '청일 간도협약 무효안'을 국회외교통상위원회에 제출했다.
◇"시효 100년설 근거 없어"= 최근 간도 문제는 한 국가가 특정지역을 100년간 실효 지배할 경우 자국 영토로 인식할 수 있다는 '100년 시효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두만강 이북의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을 경우 이 땅은 영원히 중국 땅으로 귀속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국제법상 100년 시효설은 논리적 근거가 박약하다는 반론이 많다. 100년 시효설에 따르면 영국이 300년간 지배했던 인도는 당연히 영국의 속토가 되어야 했지만 인도는 한국이 일제로부터 독립한지 정확히 2년뒤인 1947년 8월 1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나라 청나라가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에 굴복해 영국에 할양한 홍콩은 막 '죽의 장벽'을 빠져 나온 중화인민공화국국이 1997년 7월 1일 10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영국으로부터 반환받았다.
이와 관련, 이성환 계명대 교수는 "영토 문제에는 시효가 없다"면서 "간도는 포기할 수도 없고, 무턱대고 우리 땅이라고 외칠 수도 없는 현실적 요소들을 고려해가며 우리의 영유권을 입증할 만한 자료 확보 및 논리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박기태 반크(VANK) 단장은 "국제재판소에 반환소송을 제기한다고 며칠 내 해결될 일이 아니다"며 "우리가 간도와 간도문제를 제대로 알고 국제사회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간도 문제는 '토문강' 해석이 관건= 간도(間島)는 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일대, 지금의 중국 길림(吉林)성 동쪽 끝에 있는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에 해당되는 지역을 가리킨다.
그러나 18세기 청나라가 조선과 중국 사이에 있는 땅을 봉금(封禁) 지대로 설정하고 간도란 불렀음을 고려하면 간도의 범위는 요하 동쪽, 송화강 서쪽까지를 거의 전부 포함한다. 이를 근거로 대한제국 시대 지금의 길림성 일대는 동간도라 불렸으며, 요하 동쪽ㆍ송화강 서쪽은 서간도로, 동간도 이북의 현재 흑룡강성 일대는 북간도로 각각 지칭됐다.
오늘날 이 지역에는 104만명의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18세기 이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남쪽에서 넘어간 조상들의 후손들로 아직도 조선족 특유의 생활풍습과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간도가 근대사에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숙종 38년(1712) 백두산 분수령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면서부터. 이 때 청나라는 범법 월경사건들을 문제삼아 목극등을 보내 백두산의 변경을 사정(査定)하자, 조선에서는 접반사 군관 이의복, 순찰사 군관 조태상 등 6명을 동행케 하여 정계비의 위치를 세웠다.
내용은 "서위 압록, 동위 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 : 서쪽은 압록강으로 경계로 하며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19세기 후반부터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으니, 그 이유는 토문강을 송화강 지류로 해석하면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가 조선의 영토가 되고, 두만강으로 해석하면 그 이북이 청나라 땅이 되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넘긴 간도 영유권= 이에 따라 양측은 서북경략사 어윤중의 제의로 1885년(고종 22년)과 1887년에 만나 정계비 문제를 담판했으나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때 우리측 대표 이중하는 '내 머리를 자를 수 있으나 강역은 줄일 수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 뒤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하자, 정부에서는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보내어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 구역으로 포함시켜 관리하게 하는 한편, 포병을 기르고 조세를 받아 간도가 우리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처음에는 간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하여 간도 파출소를 두더니, 1909년(융희 3년) 9월 간도 협약을 맺고 청나라로부터 남만주철도 부설권(심양-대련)을 보장받은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 주고 말았다.
간도협약 제 1조에는 "청ㆍ일 양국 정부는 두만강을 한ㆍ청 경계로 상호 성명하고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백두산 남쪽)를 경계선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이 때부터 1962년 북한이 '조중 변계조약'을 체결해 백두산의 반절을 확보하기 전까지 한-중 국경선은 두만강 상류인 석을수로 확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간도는 일제 36년간 더 많은 이민을 유발하면서 청량리 전투,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등 수많은 항일독립운동의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는 1949년 간도 지역에 남아있던 조선족들의 도움을 받아 이 지역을 합병하고 복속시켰다.
◇ 권리주장과 동시에 절묘한 외교력 필요 = 간도 문제에 대한 100년 시효설이 한창 제기되던 2004년초 중국은 동북공정(동북공정)을 막 주장하며 한국의 간도 영유권 주장은 '허구로 날조된 국제 외교 사기극'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간도라는 지명과 간도의 지리적 위치, 조선인 거주시기, 간도문제 발생 요인 등 간도문제 전반을 부정하며, 간도의 지명도 원래부터 고유한 명칭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서 허구로 만든 명칭이라 격하했다.
이어 19세기 백두산 정계비 등도 조선인이 위조하여 중국에게 영토를 요구한 허위 날조된 사건으로, 훗날 일본이 이를 근거로 쇠퇴해 가는 청나라를 압박하여 만주의 권리를 찬탈해 간 국제 외교 사기극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무엇보다 남북 통일 후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우리측에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말 것을 요청한 것도 그 맥락이다.
그러나 국제법상 '100년 시효설'과 상관없이 지금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통일된 후 이 문제를 제기하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본이 1905년 합병한 독도의 영유권을 아직 실효적으로 지배하지 못함에도 계속 주장해 사후에 뭔가 근거를 남겨 두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이일걸 간도학회 회장은 "청일간의 협약 자체가 무효임을 입증하는 사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을 뿐더러 정부도 지난 2003년에 이미 협약이 법리상 무효함을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며 "우리의 권리를 지키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절묘한 외교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