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기고] 희망의 겨울을 만들자

비 온 후에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체감온도는 더욱 낮아진다. 마음에 찬 바람이 부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시간일까.국회 출입문 바깥에서 바람 한 가운데 서 있는 어머니, 아버지들을 만난다. 「의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법률안」이 이번 회기 안에 통과될 것을 촉구하는 분들이다. 70, 80년대 어느 날 갑자기 귀한 자식을 뺏기고 아픔과 상실의 나날을 보낸 분들이다. 자동차를 타고 그냥 지나칠 때가 많지만 마음은 오랜 동안 그 자리를 맴돈다. 날이 차가워 질수록 떠나버린 자식들이 더욱 그립고, 그리우리라. 20세기가 저 산을 넘어가고 있다. 이근안(李根安) 전경감이 자수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주마등처럼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가, 아, 20세기가 가기 전에 이 사건을 마무리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을 밝히고, 상처받은 이들의 가슴과 세월에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용서받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일이다. 검찰의 수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그 내막을 알지는 못하겠다. 따로 개인적으로 할 수는 없고, 이런 지면을 빌어 말하고 싶다. 진실만이 최선이라고 말이다. 공소시효가 지난 김근태 고문 사건에 대해서만 그것도 띄엄띄엄 부분적 사실만 밝히고 있는 이근안 전 경감의 법정진술은 그래서 아쉽다. 그리고 두렵다. 혹시 「고문」이라는 지난 어두운 시대의 문제가 새로운 세기가 되어서도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이다. 요즘은 정말로 난감한 상태가 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정치가 헝클어져 있어서 그렇고, 21세기를 희망으로 맞을 수 있는가 하는 조바심 때문에 그렇다. 사회 구성원 각각의 이해와 나라의 앞날에 대해 대화와 타협으로 조정해 나가는 것이 정치의 고유한 업무이다. 그런데 정치가 오히려 갈등을 부추키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오히려 입히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 폭로정국이 답답하다. 국민에게 면구스러운 점 감출 수가 없다. 세상에는 공작과 역공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직이라는 명제가 있다. 정치가 아무리 상호간에 펼치는 권력투쟁적 측면이 상당히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많이 정도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여와 야가 없다. 옷 사건에 대해 국정최고책임자에게 거짓 보고를 했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다스려야 한다. 몇 개인이 한 나라 내부의 신뢰를 어떻게 이 정도로 망가뜨릴 수가 있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또 책임있는 의원의 신분으로 모종의 이해관계를 위해 정보라는 것을 부적절하게 흔들어댔다면 그에 대한 분명하고 책임있는 태도를 표명해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정치가 미래에 대한 책임, 그리하여 희망의 징검다리를 놓는 것은 현재로서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어려운 때일수록 근본적 낙관주의에 서야 한다는 말은 한낱 지루한 설교처럼 들린다. 지난 11월 중순부터 부산, 광주, 대전등에서 강연을 했고, 또 몇 개는 예정되어 있다. 나는 거기서 겨울을 보았다. 그 겨울 앞에서 한없이 초라했고, 나목보다 더 시린 가슴이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기온보다 더 찬바람 부는 듯한 민심의 겨울을 목도한 것이다. 민심이 목마르게 기다리는 길은 진실과 정직과 함께 가자는 것이다. 투명하게 하고, 양해를 구할 것은 구하고, 그리고 또한 강하게 밀고 가야 할 것은 강하게 가라는 얘기다. 새로운 천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이 가볍지가 않다. 20세기의 구태를 훌훌 털고 21세기로 갈 수는 없는가. 선의라는 이름으로 만나, 새로운 세기의 약속과 비전을 토론하고 경쟁하는 그런 정치를 희망한다. 그렇지 않아도 무언가 막연히 21세기가 두려운 국민들에게 희망의 빛을 주는 일은 지금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그 출발은 지난 시대 제로섬의 관행과 불신의 그늘을 용기를 내어 벗어 던져 버리는 일일 것이다. 세월과 나무는 묵어가지만, 한번도 제 역할을 쉬지 않는다. 세월은 아픈 상처를 삭이며 미래를 바라보고 있고, 나무는 지금 나목이지만 또 겨우내 희망의 싹을 틔울 것이다. 희망의 겨울을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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