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여유돈 콜시장서 초단기 운용/생산현장엔 투입안돼 기업 속수무책시중실세금리가 하락하는데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느끼는 자금시장 상황은 아직 엄동설한이다. 돈이 돌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권이 마땅한 자금운용처가 없어 남아도는 자금을 초단기로 운용, 콜금리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으나 정작 기업들은 생산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얻기 어렵다.
재계서열 34위인 대농그룹이 자금난을 견디다 못해 부도방지협약 대상기업이 됐던 19일에도 자금시장은 평온했다. 오히려 전날에 비해 초단기금리인 콜금리는 0.44%포인트, 회사채유통수익률은 0.02%포인트, 양도성예금증서(CD) 유통수익률은 0.10%포인트 떨어졌다.
종금사 등 제2금융권을 중심으로 한계기업에 대한 여신을 줄여나가는 상황에서 자금시장은 안정세를 유지한 것. 기업들이 「풍요속 빈곤」을 절감하는 사이 시중금리는 이제 전혀 실세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허세금리」라고 비아냥대기도 한다.
현재의 자금시장 지표들만 보면 문제를 발견하기 어렵다. 한국은행의 통화지표인 MCT(M2·총통화+CD·양도성예금증서+금전신탁)증가율은 지난 4월 16.6%, M2증가율은 20%를 웃돌았다. 5월들어서도 이같은 추세가 이어져 시장전체적으로 자금이 모자라는 상황이 전혀 아니다. 금리도 이를 반영, 하향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19일 콜금리는 연 12.09%, CD수익률은 연 12.60%, 회사채수익률은 연 12.15%에 머물렀다. 지난달말에 비해 최고 2%포인트나 떨어진 수준. 6월께는 회사채수익률이 연11%대에 들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환율도 엔화환율 급락에도 아랑곳없이 달러당 8백90원대에서 안정돼 있다.
그러나 이같은 안정은 기업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은행 신탁의 주요 운용수단인 기업어음(CP)은 대기업들의 잇단 부도여파로 더이상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은행들은 기업어음 매입을 기피하는 대신 남아도는 자금을 콜시장에서 단기로 운용하고 있다. 당연히 콜시장의 자금은 넘쳐났고 콜금리는 떨어지고 있다.
제2금융권의 사정도 비슷하다. 종금사의 CMA(어음관리계좌) 수신이 5월들어 지난주까지 2천5백13억원이나 증가하는 등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자금운용수단은 마땅치 않다. 오히려 종금사, 파이낸스, 할부금융 등 신용대출이 대부분인 제2금융권은 특정 대기업이 부도방지협약 대상으로 선정될 경우 대출금을 회수할 길이 없어지자 특정 기업의 자금사정이 나빠질 경우 대출금 회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계기업의 부도를 앞당기는 셈이다. 당연히 부도방지협약 대상에서 제외되는 중견기업들에 대해서는 더 민첩하게 대출금회수에 나서는 형편이다.
이는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지방소재 종금사들에 더 심하게 나타나 어음만기 연장조차 꺼리는 종금사가 대부분이다.
금융권이 이처럼 몸을 사리는 데는 엄청난 규모로 누적돼 있는 부실여신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난 3월말 현재 은행감독원 기준(회수의문+추정손실)의 8대 시중은행 부실여신은 3조4천9백73억원에 불과하지만 3개월이상 연체를 포함한 고정여신 및 요주의여신을 합할 경우 30조원을 넘어선다. 총여신 2백19조원의 15%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올들어 3개월동안 늘어난 부실여신만 3조7천억원수준. 여기에 4월이후 부도방지협약 대상으로 선정된 진로그룹, 대농그룹의 여신과 삼립식품 등 부도로 쓰러진 중견기업의 여신을 더할 경우 그 규모는 5조원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부실여신이 늘어날수록 은행권은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마련이다.
조흥은행 위성복 상무는 『은행이나 종금사 모두 부실여신에 대한 부담으로 기업대출을 기피, 자금여유에도 불구 마땅한 자금운용처를 찾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져 있다』며 『대부분의 금융기관들이 여유자금을 콜시장에 내놓으며 단기로 운용하고 있어 금리는 내려가지만 기업자금사정은 좋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돈이 생산현장에 투입되지 않고 금융기관 사이에서 맴돌고 있는 동안 한계기업들은 자금난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손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