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21세의 한국책략.

“친(親) 중국, 결(結) 일본, 연(聯) 미국하고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 1880년 일본 주재 청국공사관 참사인 황준헌이 쓴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의 핵심내용이다.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을 강요 당한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제 2차 수신사였던 김홍집이 일본에서 청국공사 하여장 등과 국제정세에 대해 교류하면서 귀국길에 황준헌에게 받아 고종에게 바친 작은 책자다.


조선책략은 황준헌 개인 생각이기보다 청의 기본적인 대외정책 방향이다. 러시아와 이리(伊犁:위구르·신장 지역) 지역에서 전쟁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일본과 손을 잡고 조선을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그러나 조선책략이 입수된 후 조선의 반응은 전혀 엉뚱한 경로로 흘렀다. 정부 내에서 찬반 논의가 격렬하게 전개됐으며 재야 유림들을 중심으로 거국적인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났다. 영남 만인소는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울었다’는 반응을 보이며 ‘책을 들여와 임금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 김홍집’의 탄핵을 주장했다. 상소를 주도한 소두(疏頭) 이만손은 재차 반대 상소를 시도하다가 유배까지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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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책략은 꼭꼭 문을 닫고 국제관계에 무지했던 조선에 개화와 척사라는 일대 논란을 일으켰지만 대외관계에 돌파구를 찾던 고종과 조정은 그 내용을 상당수 받아들였다. 지금 외교부에 해당하는 통리기무아문이 1881년에 설치되고 미국(1882년)과 수교한 데 이어 영국·독일 (1883년),러시아(1884년)에 잇따라 외교관계를 맺고 개방의 길로 나섰다.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는 신사유람단이, 청에는 영선사가 파견되고 신식군대인 별기군도 편성했다.

그러나 조선책략은 결과적으로 30년 후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탄함으로써 실패했다. 130여년의 시간이 흘러 한반도 주변 정세가 마치 구한말처럼 돌아가는 듯 하다. G2인 미국과 중국 두 나라가 한반도라는 지점에서 충돌하는 양상이다. 여기다 일본은 북한은 북한을 꼬드겨 재무장화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우리의 힘을 키워 살길을 도모할 21세기형 ‘한국책략’이 절실한 시점이다./온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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