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알약 하나로 공포증 치료한다

美 르듀 박사 "두뇌속 편도체에 공포기억 저장"<br>제약사들 "특정기억 삭제 약물 2010년께 상용화"<br>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겪는 환자 치료 새장 열려<br>일부선 "평범한 기억까지 사라질수도" 위험 경고


거미·뱀·고소·폐쇄·대인 등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대부분은 과거의 무서운 경험에서 비롯된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쯤 있다. 어떤 사람은 뱀, 거미 등 특정 사물에 공포감을 느끼며 어떤 사람은 높은 곳, 좁은 곳 등 특정 장소에서 극심한 공황장애를 일으킨다. 문제는 인간의 의지로는 이 같은 공포감을 이겨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앞으로는 알약 한 알만으로 모든 두려움에서 완벽히 해방될 수 있을 전망이다. 공포감의 근원이 되는 과거의 기억을 차단함으로서 공포 유발을 막아주는 약이 2010년경 출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 약이 상용화되면 공포라는 단어가 사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공포의 창조자 '편도체'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시행된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중 무려 50%가 뱀 공포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36%는 고소공포증, 27%는 거미공포증, 18%는 비행공포증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비율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공포증들은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매우 평범한(?) 현상이다. 과연 인간이 느끼는 이러한 공포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공포 치료의 대가(大家)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 뉴욕 대학의 신경과학자 조셉 르듀 박사는 '과거의 기억'에서 원인을 찾는다. 뱀․거미와 같은 특정 사물은 물론 고소공포․폐쇄공포․대인공포 등 특정 장소에 대한 공포 역시 과거에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무서운 기억이 근저에 깔려있다는 것. 개에 물려 본 아이가 커서도 개를 무서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관련, 르듀 박사는 지난 20여 년간의 심도 깊은 뇌 연구 끝에 이 같은 공포 기억의 치료에 전기가 될 획기적 사실 하나를 발견해 냈다. 눈 뒤의 전뇌부에 위치한 편도체(amygdala)가 바로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뒤섞어 공포라는 이름의 괴물을 창조해 내는 장본인임을 밝혀낸 것. 실제 그는 쥐 실험을 통해 시각 및 청각 신호를 가장 먼저 전달받는 뇌의 시상(thalamus)이 편도체와 곧바로 연결돼 있으며 이 연결을 차단하면 두려움도 사라진다는 것을 입증, 편도체에 공포 기억이 저장돼 있음을 증명해 냈다. 특히 그는 얼마 전 쥐에게 기억 형성 억제 화학물질인 'UO126'을 투여, 이미 각인된 2개의 공포 기억 중 하나를 선택적으로 없애는데 까지 성공했다. 공포심 등 인간의 감정은 복잡한 심리학적 현상일 뿐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그동안의 정설을 깨고 한번 생성된 기억을 약물을 통해 인위적, 선택적으로 제거해 버린 것이다. 기억을 제거하라 그의 실험 결과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지에 발표되자 전 세계 신경과학계에는 큰 반향이 일었다. 두뇌에서 특정 기억만 삭제할 수 있다면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평생 고통 받는 상이용사나 강간 피해자, 대형사고 생존자들에게 정상적 삶을 영위하도록 해줄 수도 있다. 이에 많은 과학자들이 르듀 박사의 실험을 검증했고 약물로 인간의 기억을 삭제, 공포감을 극복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현재 공포치료 연구가들이 주목하고 있는 약물은 결핵 치료제로도 잘 알려진 D-사이클로세린(DCS). 이 DCS가 새로운 기억 생성에 효과적이기 때문으로 과학자들은 DCS를 활용, 과거 기억을 새로운 기억으로 대치시켜 공포치료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두뇌에 직접 주입해야 해 인체 실험이 어려운 UO126과 달리 DCS는 이미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상태여서 즉시 임상실험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실제 미국 에모리 대학의 정신의학과 마이클 데이비스 박사는 얼마 전 고소공포증 환자에게 DSC를 투여한 뒤 고층빌딩을 오르내리는 가상현실(VR) 영상을 보여주는 실험을 했는데, 과거 기억이 현재의 편안한 기억으로 대치돼 공포감이 크게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그는 300여명의 PTSD 환자들을 대상으로 DCS와 VR시스템을 복합한 공포치료제 개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르듀 박사 또한 PTSD에 시달리는 참전용사들을 대상으로 DCS 인체실험을 계획하고 있다. 연구팀은 이를 위해 시각적․청각적 정보는 물론 촉각적․후각적 자극까지 제공하는 강력한 VR시스템을 운용할 예정이다. 특히 애틀랜타의 디과 테라퓨틱스사는 PTSD, 고소공포, 폐쇄공포, 대인공포 등 거의 모든 공포증을 치료하는 DCS 치료제의 개발을 완료하고 2009~2010년경 상용화를 목표로 FDA 승인 획득에 나선 상태다. 이 회사는 각종 공포 상황을 재현한 시뮬레이션을 DVD에 담아 DCS 캡슐과 함께 '가정용 자가 치료 세트'로 공급할 계획이다. 큰 기대, 큰 위험 앞으로 DCS 공포치료제가 상용화될 경우 사람들은 공포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게 된다. 연구의 진전에 따라서는 잊고 싶은 고통스런 기억은 지워버리고 행복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이 기억 제거 약물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복잡한 기억은 뇌의 여러 부위에 걸쳐 수많은 뉴런들이 관련돼 있고, 하나의 뉴런이 동시에 여러 가지 기억을 붙잡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편도체의 공포기억을 변조하는 과정에서 뇌의 다른 부분에 있는 평범한 기억까지 제거하거나 손상시킬 개연성을 배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공포가 더 악화되거나 공포와 관련된 유익한 기억까지 사라져 버릴 수 있다. 고소공포증 환자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빌딩에서 투신하거나 거미공포증 환자가 일부 거미에 치명적인 독이 있다는 지식까지 잃어버릴 수 있는 것.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공포가 인간의 기본 본능이라는 점이다. 사실 공포는 위험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수백만 년의 진화를 거쳐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 시스템을 강제로 붕괴시킬 경우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르듀 박사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각각의 인간은 단순히 지각, 공포기억, 사고, 감정의 집합체가 아니라 이것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낸 고차원적 존재"라며 "하지만 DCS 연구는 우리가 두뇌에서 공포, 감정, 기억을 조절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을 연마하게 해줄 미래 뇌 연구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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