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방민준 골프세상] 이게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무라카미 류의 소설제목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떠올렸다. 한여름 풍만했던 숲은 노랗고 붉은 계열의 원색조 화장을 한 채 모로 드러누워 있었다. 이른 아침의 찬 공기는 크리스털의 연못에 잠긴 듯한 착각도 불러 일으켰다. 거기에 아직 녹색을 잃지 않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네 명의 동반자들은 모두 상기된 모습이었다. 모두 스스럼없는 골프 메이트라 두어 달 만의 라운드 약속을 손꼽아 기다려온 터였다. 모처럼의 라운드라 그런지 한 샷 한 샷이 그렇게 신선할 수 없었다. 코스도 유난히 친숙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고 집중도 잘 되었다. 미스 샷은 연습을 게을리 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니 아무런 응어리를 남기지도 않았다. 발에 밟히는 잔디의 촉감이 피부 속으로 전율처럼 전해졌고 풀에 맺힌 이슬의 촉감에 눈이 시렸다. 주변의 모든 산천경개가 생긴 그대로 아름답게 다가왔다. 나만 꿈을 꾸듯 라운드를 하는가 싶어 동반자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더니 모두가 웃는 얼굴이다. 어드레스를 하면서 잠시 심각한 듯한 얼굴로 변했다가 스윙을 마치고 나면 이내 편안한 얼굴로 돌아와 골프를 즐기는 묘미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 중에서 유난히 한 분의 라운드 하는 모습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원래 호인의 외모였지만 그날은 무언가 달랐다. 투명한 하늘을 보며 “우주가 따로 없네요. 하늘 속으로 첨벙 뛰어들고 싶지 않으세요?”하고 묻는가 하면 길가 야생화들을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슬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린에 올라와서는 “발가벗고 뒹굴고 싶은 충동이 생기네요”라는 말까지 했다. 그렇다고 퍼팅을 슬렁슬렁 하는 것도 아니었다. 부지런히 그린을 바장이며 라인을 읽어내고는 신중하고도 확신에 찬 스트로크를 했다. 스코어는 저절로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야 골프를 배울 때부터 라운드가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지만 이왕 골프를 하러 나왔으니 스트레스를 풀고 철저하게 자연과 골프를 즐기자는 자세를 갖고 있었지만 골프 자체에 매달려왔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이 분은 달랐다. 전에도 스코어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라운드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그날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즐기면서 한 샷 한 샷 허투루 날리는 게 없는 그런 모습은 아니었는데 무언가 달랐다. 그늘집에서 막걸리를 시키자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양은 그릇이 나왔다. 부침개까지 있으니 영락없이 야외놀이 모드로 변했다. “이 가을에 골프장에서 막걸리 마시는 것도 별미지요! 이게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그 분다운 코멘트가 뒤따랐다. 평소 같은 리듬 깨진다며 라운드 중에 술을 입에 대지도 않던 동반자도 분위기를 참지 못해 막걸리를 마셨다. 순간 이러고 있는 네 사나이들이 참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계절, 좋은 날씨에 좋은 동반자들과 라운드를 하며 막걸리까지 마실 수 있는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18홀을 벗어나는 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골프장 근처 수수한 식당에서 기분 좋은 식사를 하는 것으로 그날의 라운드는 막을 내렸다. 귀가 길에 동승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김 사장 뭔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그런 것 같아. 골프를 대하는 자세가 변한 것 같은데.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자세도 변한 것 같고.” 친구의 설명이 이어졌다. “회사가 흑자부도 위험에 처해 있어. 회사는 잘 돌아가는데 은행에서 대출 상환하라고 야단인가봐. 여기저기 돈 구하러 다니느라 제 정신이 아닌 상황인데도 저렇게 골프를 즐기는 것을 보면 대단한 친구야!” 친구의 설명을 듣자 그 분의 자세가 더욱 존경스러웠다. 자기 회사가 생사기로에 있는데도 골프를 즐길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 할 땐 일에 집중하고 골프장에 와선 골프와 자연을 철저하게 만끽한다는 철학을 터득한 것 같아. 저 정도는 돼야 진짜 골퍼가 아니겠어?” 친구의 이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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