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동십자각] 케이블TV 유감

우현석 정보산업부 차장

1년 전 기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 현관에 주민 설문이 나붙었다. 케이블TV망을 깔아 500원이라는 ‘거저나 다름없는’ 저렴한 값에 십수개의 TV채널을 볼 수 있도록 하려는데 이에 대한 찬반투표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투표결과 25% 정도의 주민은 반대표를 던졌지만 나머지 75%의 주민은 찬성표를 던졌다. 덤핑에 가까운 염가의 케이블TV 방송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케이블TV에서 방영하는 만화영화 채널 앞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았다. 또 케이블TV는 해만 떨어지면 시도 때도 없이 성인물을 방영해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집마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TV시청을 단속하더니 이제는 지쳤는지 부모 자식간에 에로물을 함께 보는 것쯤은 무감각해져버렸다. 이런저런 부작용이 불거지는 것과 함께 중계사업자들은 또 다른 속내를 드러냈다. 어느날 아파트 현관 앞에 또 나붙은 종이쪽지는 유선방송 시청료가 2,000원으로 단숨에 400%나 올랐음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케이블TV 업체들은 아파트단지의 관리사무소와 부녀회를 공략, 일단 망을 깔아놓은 뒤 이를 기반으로 초고속인터넷과 케이블TV 시청을 함께 할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을 팔아 수익을 올린다. 또 업자들은 가입자들의 머릿수를 내세워 홈쇼핑 사업자들에게 ‘슈퍼 갑(甲)’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 관할 당국인 방송위원회는 “주민 투표라는 절차를 통해 케이블 망을 깔았다면 유선방송을 송출하는 것은 주민자치와 관련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강제할 도리가 없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이 나라에 지어진 아파트에 살면서 유선방송을 안볼 자유를 누릴 방법은 없는 셈이다. 케이블TV로 시간을 죽이거나, 아이들 돌보기 귀찮아 TV앞에 앉혀놓는 주민들을 위해서 그 이웃은 울며 겨자 먹기로 보기싫은 TV를 봐야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에 자랑할 만한 정보통신 강국이 됐다고 한껏 고무돼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칭찬에 취해 소수의 권리와 윤리를 도외시한 채 기술적 발달에만 만족해 한다면 ‘오늘의 과실’이 ‘내일의 부담’으로 뒤바뀌는 상황은 순식간에 닥쳐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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