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경제수필] 우리집 바로 찾기

李建榮(전 건설부차관)얼마 전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 아랫층 집을 잘못 알고 들어갈 뻔한 실수를 했다. 아마 요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비슷한 경험이 있으리라. 90년엔가 아일랜드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여행 중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더블린 주변의 칙칙한 테라스 하우스들이었다. 기후는 영국보다 더 음산한 듯 했고, 경제사정도 다른 유럽 나라들에 비해 낮아 집들은 수수한 편이었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보는 길가의 줄지은 테라스 하우스들은 아담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마다 특징있는 문을 달고 있었다. 테라스 하우스란 길에 연이어 지은 연립주택으로 대개 2층으로 되어 있다. 거의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문만은 제각기 다른 것이다. 저마다 특색있는 색깔을 칠하고 손잡이나 장식도 개성이 있다. 집이 똑같아 아마 문만이라도 다르게 하자는 의도일 것이다. 책방으로 갔더니 색깔있는 예쁜 문들이 나란히 찍혀있는 포스트 카드가 있어서 얼른 한묶음 샀다. 영국이나 아일랜드의 테라스 하우스는 거의 모양새가 비슷하지만, 프랑스에 가면 같은 집이 둘 이상 없을 정도로 디자인에 특색이 있다. 나는 처음 잠실에서 복도식 아파트에 살았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는 다달이 짝수층과 홀수층 교대로 섰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는 날이면 얼결에 다른 층에 내려서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김광식씨의 소설 「213호의 주택」을 연상하곤 했었다. 50년대 후반에 똑같은 모습으로 지은 재건주택단지에서 남의 집을 자기집으로 착각을 하고 들어가는 현대판 우화 말이다. 그런데 요즘의 아파트는 과거의 재건주택보다 더 스테레오타이프하다. 이제는 사람의 개성에 맞도록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아니라, 확일화된 집에 사람이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몇년 전 아파트를 새로 구입할 때 수리를 하는 김에 문도 바꾸고 싶었다. 우선 아파트의 묵중한 철문을 나무문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집과 구별되도록 환한 색깔로 바꾸고, 초인종 옆에는 나름대로 조그만 문패라도 걸고 싶었다. 그런데 아파트 관리사무소 측은 방화문이라 나무문은 안되고, 색깔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문의 안쪽은 내가 원하는 대로 칠을 해도 되지만 문의 바깥 쪽은 공유라는 것이다. 결국 나도 아파트의 똑같은 분자가 되었다. 나는 우리집 문을 열 때마다 동호수를 거푸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행여나 남의 집을 열고 또 실례라도 저지르면 어덕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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