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시나리오설/이기형 정경부 기자(기자의 눈)

『정부와 채권단은 당초 의도한 시나리오에 의해 기아를 제3자에게 인수시키려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다.』범 기아 정상화추진 비상대책위원회가 23일자 각 일간지 1면에 일제히 낸 「기아 법정관리 강행 기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 중 일부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이 광고문안을 보고 지난 1백일 동안 기아사태 해결의 발목을 잡았던 악령이 다시 우리 경제를 휘감기 시작할 조짐이라고 촌평했다. 지금까지 기아사태가 조기에 매듭을 짓지 못하고 혼미의 늪에서 허둥댄 데는 이 시나리오설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기아가 부도유예협약에 적용되던 날 금융권 관계자들은 냉철한 금융논리상 조속한 3자인수가 가장 경제적인 해결책이라고 지적했다.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으로서는 회사가 어떻게 되든 돈만 되찾으면 그만인 풍토에서는 이런 판단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시나리오설의 위력은 이같은 접근방안이 다시 입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기아사태 발발부터 법정관리 발표까지 기나긴 1백일 동안 제3자인수는 공식적으로 거론되는 것조차 터부시됐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유독 시나리오설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곳은 공교롭게도 다름아닌 기아였다. 기아사태의 파장은 대기업의 연쇄부도, 자금시장 불안, 증시 붕락, 외환위기 등 우리 경제에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를 몰고왔다. 기아에 대한 법정관리 방침 발표로 일단 상황은 단숨에 반전되는 느낌이다. 모두가 바라던 일이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든 시나리오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다. 경위와 이유야 어쨌든 부도난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것은 채권채무관계 청산과정에서 불가피한 수순의 하나다. 지금까지 제2금융권의 갑작스런 자금회수로 흑자도산한 회사도 한 둘이 아니다. 금융의 냉혹한 논리로 따질 때 기아만 예외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게 금융계 종사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기아비상대책위는 이날 광고에서 「총파업은 물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라고 주장했다. 이 문안을 보는 상당수 사람들이 다소 처연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때마침 가을이 깊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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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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