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 시립묘지에는 지난 1930년대 스탈린 치하에서 처형된 이들을 기리는 기념석이 있다. 거기에 낯익은 항일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이름 가운데 시인이면서 소설가였던 '조명희'가 있다.
1928년 러시아에 망명한 뒤 연해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동포신문 '선봉', 잡지 '노력자의 조국'을 만들던 조명희가 체포된 것은 1937년 9월의 일이다. 스탈린 정권은 그에게 '일본간첩'이라는 죄명을 씌워 총살형에 처했고 그의 시신은 하바롭스크 시립묘지에 묻혔다. 스탈린 사후인 1956년 소련 정부는 조명희를 복권시켰다. 복권된 조명희의 기념관은 그가 묻힌 하바롭스크가 아니라 무려 6,000㎞나 떨어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만들어졌다. 그 도시에는 '조명희 거리'도 있다고 한다.
그가 체포돼 총살당한 그때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고 조명희의 가족들도 중앙아시아로 쫓겨갔다. 조명희의 기념관이 그곳 타슈켄트에 만들어진 연유이다.
조명희의 장남은 '선인'이고, 장녀는 '선아'다. 그는 아이들을 꼭 성도 함께 붙여 "조선인~" "조선아~" 하고 불렀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잊지 못할' 조국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는지 전해진다.
이역만리에서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다 조국을 그리워하며 생을 마감한 이는 조명희 한사람만이 아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갔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카레이스키'로 정착한 동포들 모두 제2, 제3의 '조명희'다. 타슈켄트의 기념관에는 그의 소설 '낙동강' 중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라는 구절이 새겨진 액자가 걸려 있다. 수많은 카레이스키들이 잊지 못할 조국으로 돌아올 날을 꼽아가며 신산스러운 삶을 이어갔다. 지금 그들의 조국은 '한국인'으로 귀국하려면 호적 등의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국적법에 따른 국적회복 요건이다. 일제치하에서 호적 등록을 거부하고 머나먼 낯선 이국에 망명해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올 날을 손꼽아온 이들에게 호적을 요구하는 법은 참으로 냉정하다. 해방 65년이 지난 지금도 조국에 '한국인'으로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조명희'들이 거기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다. '호국의 달' 6월에 카레이스키들에게 조국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