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자 도산속출 양곡정책 전환시급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이후 농산물 보조금 삭감으로 농가가 상당한 어려움에 처한 가운데 우리의 주곡인 쌀산업이 소비위축→재고누적→가격하락의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총체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생산자인 농민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이고 미곡종합처리장(RPC)을 비롯한 유통업자들의 도산도 속출하면서 민간유통기능도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여기에다 정부는 정부대로 보조금 삭감으로 추곡수매에 한계가 있는데다 예산지원도 쉽지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증산위주의 정부 양곡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빈곤의 악순환
23일 농협에 따르면 지난 96년 169만석이던 쌀 재고량은 99년 501만석, 2000년 749만석으로 늘어난데 이어 올해는 1,118만석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는 세계식량기구(FAO)가 권장하고 있는 적정 재고량인 550만~600만석(연간생산량의 17~18%)을 훨씬 넘어서는 양이다.
이처럼 재고가 급증하는 것은 생산량은 줄어들지 않는 상태에서 수요는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생산량은 연간 3,500만석 수준을 유지하는 반면 1인당 소비량은 96년 104.9㎏에서 99년 96.9㎏, 지난해 94㎏으로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반면 WTO 협정에 따라 보조금 삭감으로 정부가 매입할 수 있는 추곡량은 94년 1,050만석에서 올해는 575만석으로 45%나 줄어들어 정부의 물량조절 기능은 대폭 약화됐다.
◇유통업자들 적자ㆍ도산 잇달아
이처럼 재고가 폭증하고 쌀이 나지 않는 계절에도 쌀값이 제자리걸음을 하자 농협과 민간의 미곡종합처리장(RPC)을 비롯한 유통업자들은 비상이 걸렸다.
충북 옥천에 있는 청산농협 미곡처리장의 경우 지난해 인근 4개 읍면에서 4,000톤의 벼를 수매했지만 올 수확기를 불과 한달도 남기지 않은 지금 1,000톤의 벼가 아직도 창고에 쌓여 있다.
하지만 쌀값은 80㎏ 한가마에 16만278원으로 수매당시와 비교해 볼 때 불과 0.4%만 올라 많은 손해를 봤다.
보관료 등 부대비용은 고사하고 대출이자(5%)도 못 건지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이 조합은 올 가을에 벼를 수매할 형편이 못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청산농협은 전체적으로 적자는 아니어서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 농협이 운영하는 미곡종합처리장 199개 가운데 70% 이상이 적자를 보고 있고 농협에 비해 정부지원이 적은 민간 RPC의 경우 올들어서만 6개가 도산하는 실정이어서 이들이 추곡을 수매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 대책은 없나
양위주서 질위주로 양곡정책 전환해야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는 "재고누적과 소비감소로 쌀가격의 폭락이 예견되고 있는 데도 정부는 농업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양정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생산량 조절ㆍ재고미의 대북지원 등 대책을 세우라"고 주문했다.
이봉주 충남 연무농협조합장은 "정부가 시장경제와 보호주의 사이에서 어정쩡한 정책을 추진하는 사이에 쌀 문제는 이제 농협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고 말했다.
양곡정책의 틀을 근본적으로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민승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농산물 개방이 가속화하고 재고가 이미 적정치를 넘어선 상황에서 양위주의 양곡정책으로는 우리 농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고 "하루빨리 질위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철수기자 csoh@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