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100년전 9월19일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철도탄생의 현장을 이처럼 눈부시게 바라보았다. 우리나라의 철도는 1899년9월18일 경인선 노량진~제물포간 33.2㎞를 개통해 그 역사를 시작했다.
당시 철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1889년 주미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이 귀국하면서 철도모형을 가져와 철도의 필요성을 알린 때부터다. 자금난 탓에 외국자본에 철도부설을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첫 철도는 일본인에 의해 개통됐다. 첫 기적이 울린 경인선은 증기기관차 4대와 객차 6량, 화차 28량이 33.2㎞ 거리를 1시간30분(평균 시속 20~22㎞, 최고 시속 60㎞)에 걸쳐 하루 두차례 왕복했다. 당시 여객운임은 1등 객차 1원50전, 2등 객차 80전, 3등 객차 40전 등이었다.
이후 한국철도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1905년 경부선 개통을 비롯해 1906년 경의선, 1914년 호남선과 경원선, 1929년 충북선, 1931년 장항선, 1936년 전라선, 1937년 수인선, 1939년 경춘선, 1942년 중앙선 등이 개통됐다. 일본은 우리의 철도를 식민지 착취와 침략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우리 철도사의 전반은 일제침략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근대사의 생생한 기록인 셈이다.
해방의 기쁨을 맞았지만 우리 철도는 또 다른 아픔을 겪는다.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이 달리고 싶은 철마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분단 이전에 비해 총연장, 영업거리, 기관차 수 등 철도의 모든 면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6.25전쟁은 그나마 절반 남은 철도시설을 철저히 망가뜨렸다. 그러나 철도당국은 59년 국산객차 제작에 성공하는 개가를 올리며 철도를 민족의 동맥으로 부활시킨다. 61년에는 디젤기관차가 도입돼 오늘날 철도수송체계의 기반을 마련한다.
60년대부터 한국철도의 경제발전의 충실한 견인차 역할을 해 낸다. 우리철도는 72년 콘테이너 화물의 수송을 시작해 수출에 기여하고 석탄, 석유 등 산업물자 수송의 효자로 떠올랐다.
철도기술의 발전도 두드러졌다. 열차자동정지장치, 열차집중제어장치 등이 확충된데 이어 78년 동력차의 국산화를 완성해 이우리 철도기술을 해외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우리철도는 이제 63개선, 631개역, 3만5,000여 종사원, 영업거리 3,125㎞의 규모로 연간 1조366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철도당국은 기술과 장비의 발전, 양적인 팽창 등에 머무르지 않고 경영의 합리화라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전철망의 확충과 혼잡선의 복선 및 3복선화를 이룬다. 1989년 서울역 민자역사 개관은 우리 철도사의 중대한 기점이 된다. 철도역사가 단순히 승하차의 범위를 벗어나 쇼핑과 문화를 아울러 즐기는 종합공간으로 부상한 것이다. 새로운 철도문화의 탄생이라는 애기다.
관광열차상품도 경영합리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 정동진관광열차, 환상선눈꽃열차 등은 히트상품이 됐다.
철도경영의 합리화는 고객만족에서 출발한다. 공공기관이 지니기 쉬운 관료주의적 울타리를 벗어나 고객중심의 경영혁신에 나섰다. 지난해 선포한 「철도혁신 100대과제」와 「철도고객 서비스헌장」이 그것이다. 이같은 노력은 지난해 한국능률협회가 주관한 98고객만족경영대상 최우수상 수상으로 작은 열매를 맺었다. 「행정기관 철도청」에서 「철도주식회사」로 탈바꿈하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