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11일] 캘리코 폭동


1719년 6월11일, 런던 외곽 스피털필드. 직공 2,000여명이 구호를 외쳤다. ‘캘리코 사용 결사반대!’ 인도산 면제품의 통칭인 캘리코의 수입과 사용 급증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직공들은 캘리코로 만든 옷을 입은 행인을 만나면 ‘새의 깃털을 뽑아내듯’ 옷을 벗겨냈다. 당시 영국인들이 싸고 질 좋은 인도산 캘리코에 얼마나 열광했는지는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이자 경제해설과 주식시장 동향을 주로 다뤘던 격일간지 ‘리뷰’의 발행인이기도 했던 대니얼 디포의 기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옷가지와 커튼ㆍ쿠션ㆍ의자ㆍ침대까지 온통 캘리코다. 페스트가 퍼지듯 캘리코 사용이 늘고 있다.’ 폭동은 단순 폭동으로 그치지 않았다. 폭동이 다른 섬유공업지대로 번지자 영국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듬해 3월 ‘캘리코 사용 금지법’을 제정하고 캘리코를 판매한 업자에게는 벌금으로 20파운드(요즘 가치 542만원), 구매자에게는 5파운드를 물렸다. 1700년 수입금지법에 이어 등장한 사용금지법의 최대 수혜자는 영국 섬유업. 인도산 캘리코를 모방 생산하며 짭짤한 수익을 거뒀을 뿐 아니라 생산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자동직조기가 잇따라 발명되며 초기 산업혁명이 싹텄다. 반면 세계 최대의 섬유대국이던 인도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영국에 완전 종속된 뒤에는 인도 내 직조행위까지 금지돼 직물을 짜는 직조공은 오른손을 절단 당했다. 인도산 원면은 영국에서 가공돼 4배 가격으로 재수입되며 인도 경제를 갉아먹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손수 물레를 짜며 영국 제품 불매운동을 벌인 데에도 이 같은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인도에는 불행의 증폭제였으나 영국에는 캘리코 폭동이 보약이었다. 집단적 분노를 단순 진압하려 들었다면 영국의 발전은 더뎌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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