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일본:2/1차 오일쇼크 기술고도화 호기로(경제를 살리자)

◎산업구조 첨단·소프트화… 「엔고한파」 에도 요지부동/에너지절약 합심… 석유비축 백42일분까지 늘려일본인들은 흔히 전후를 대표하는 일본인으로서 남자는 총리를 지낸 다나카 가쿠에이(전중각영·1918∼1993)를, 여자는 한국계 대중가수 미소라 히바리(미공운작·1937∼1989)를 꼽는다. 다나카는 초등학교 학력으로 정계에 입문, 30세 때 정무차관이 된 이래 장관·집권자민당 간사장·총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후 최연소의 기록을 남긴 일본 정계의 전설적 인물이다. 이에대해 미소라는 전후 패전의 그 음울했던 시기에 가슴을 적시는 노랫가락으로 일본인들의 상흔을 달래준 「구원의 여인상」이었다. 다나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일본 금권정치의 상징으로 돼 있으나 그는 전설 못지 않게 큰 치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72년 총리에 올라 「금맥스캔들」로 74년 퇴임할 때까지 2년이란 짧은 재임기간 동안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도 수립한 장본인이었다. 일본은 다나카가 총리로 재직하던 당시 제1차 오일쇼크(73년 10월∼74년 4월)를 맞는다. 제1차 오일쇼크는 일본이 한창 고도성장의 나래를 펼 때 찾아온 복병으로서 당시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일본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이 발발하자 중동의 아랍권을 중심으로 하는 산유국연합은 석유를 무기로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 석유수입국에 대항했다. 이때까지만도 일본은 경제운영의 기조를 「돈만 있으면 석유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전제, 정책을 펴나갔으나 이같은 전제가 무너지자 크게 당황했다. 1차 석유위기 당시 일본은 원유의 99.6%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석유 수입국인 일본은 수입선 의존도가 중동 40%, 이란 37%였다. 전쟁발발 후 꼭 10일만인 10월16일 아랍석유국수출국기구(OAPEC)는 원유공시가격을 일방적으로 인상했다. 아라비안라이트 1배럴당 가격은 당시 3달러 정도에 불과했으나 1.7배인 5달러11센트로 인상한 것이다. OAPEC는 다음날에는 원유 감산을 결정한데 이어 반아랍국가에 대한 전면 금수를 선언했다. 일본은 미국처럼 대아랍 적대국은 아니었지만 영·불·호주 등처럼 우호국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산유국연합은 일본에 대해서 원유공급을 20%나 줄인 것이다. 그해 12월23일 아랍산유국연합은 두번째의 원유가 인상을 단행했다. 전쟁발발 전보다 무려 4배나 올린 것이다. 오일쇼크가 일본국내에 몰고 온 패닉현상은 2차대전 당시의 상황과 비슷했다. 특히 석유비축분이 49일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극도의 불안감이 일본열도를 휩쓸면서 국민들 가운데서는 화장지를 비롯 세제·설탕·소금까지 매점 매석하는 사태가 일기도 했다. 이같은 사태는 다음해인 3월18일 아랍석유장관 회의가 금수해제를 결의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때 물가는 30%까지 치솟았으며 전후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다나카는 당시 난국을 헤쳐가기 위해 국민들에게 어필되어 있는 「서민재상」이라는 이미지를 무기로 석유의 소비규제와 생필품에 대한 가격규제를 할 수 있는 「석유관련 2개 법안」을 한달만에 입법화했다. 사실 이 2개 법안은 일제를 상기시키는 규제 일변도의 법으로서 국회에서 논란도 많았으나 다나카는 특유의 리더십으로 통과를 강행했다. 이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과 관련, 당시 아이치(애지규일) 장성장관이 과로로 숨지기도 했다. 일본정부의 에너지 비상 절약대책이 처음 적용된 대상은 동경의 얼굴인 긴자(은좌)의 네온사인이었다. 동경에서 가장 화려했던 긴자의 네온이 꺼지자 당시를 기억하는 나이 든 사람들은 『2차대전 직후의 어둡던 밤보다 더 어두웠다』고 회고했다. 에너지 절약 비상대책은 또 사무실 및 집안의 난방온도를 섭씨 20도를 넘지 않도록 하고 영업용차량의 시속은 80㎞로 제한하며 휴일과 오락 목적의 드라이브를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같은 「석유한파」 탓인지 이 해 겨울 일본에는 독감이 유난히 맹위를 떨치기도 했는데 일본 국민들은 비교적 정부조치에 순응, 큰 파동없이 겨울을 넘길 수 있었다. 다나카는 74년 10월 석유위기를 수습한 후 「금맥스캔들」로 물러났다. 2년 후에는 록히드 스캔들이 터져나오면서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지만 국민들의 인기는 여전했다. 일본은 4년 후 또 한차례의 오일쇼크를 경험한다. 79년 이란혁명을 계기로 일어난 제2차 오일쇼크는 3년간 계속되나 제1차 쇼크 당시 대비책을 마련해두었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석유비축분을 민간 85일, 국가비축 7일로 늘렸는데 이는 1차 때보다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지난 90년 8월 이란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야기된 걸프위기때 일본의 석유 비축분은 민간 88일, 국가비축 54일로서 1차 오일쇼크로 혼이 난 일본의 대비책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경제평론가인 안도 히로시(안등박)씨는 『제1차 오일쇼크는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시기였다』고 지적하면서도 『그러나 이때 일본은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이 공업제품 경쟁력으로 미국과 유럽국가들을 제치고 「경제대국」으로서의 위치를 굳힐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오일쇼크 덕택이었다는 설명이다. 일본은 오일쇼크를 겪고 나서 비로소 일본경제를 하이테크화했으며 정보화, 서비스화, 소프트화로 체제를 전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엔고시대에도 견딜 수 있는 체질이 됐다는 풀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다나카 전 총리는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에 리더십으로 나라를 이끌었다는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당시의 어려움을 거울삼아 정진, 경제대국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에 오르다 거꾸로 떨어진 만신창이 모습이다. 우리가 일본에서 배워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동경=정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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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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