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 전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첨단 기술 확보는 필수다. 그래서 정부나 기업을 가릴 것 없이 적극적인 연구개발(R&D)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기술 개발 역량이 부족한 기업들의 경우 경쟁업체의 기술을 빼내는 데 사활을 건다. 미국의 경우 전세계 지적재산권 가운데 86%를 갖고 있지만 이런 지재권을 통해 확보하는 수익 비중은 전세계의 50%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36%는 기술 유출 등으로 그대로 유실되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등 전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첨단 기술을 노린다.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철강, 조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힘들여 개발한 기술이 외국으로 빠져나간다면 경쟁력을 보장할 수 없다. 김창제 산업보안협의회 이사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휴대폰 등 여러 분야에서 중국과의 기술격차가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것은 산업스파이를 통한 기술유출 영향도 크다”고 지적했다. 방법은 하나 뿐이다. 알토란 같은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튼튼한 장벽을 쌓아야 한다. 그저 CCTV등과 같은 유형의 보안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산업 보안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동시에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보안의식을 높이되 성과 보상도 확대해야=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곤 산업 보안에 대한 인식은 한심한 수준이다. 중요한 기술 또는 기밀을 지키려는 체계적인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지만 투자 우선 순위에서 밀려 나고 만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발표한 ‘국내기업의 산업기밀 유출실태’ 결과에 따르면 국내기업의 산업 보안 관련 투자는 전체 투자의 1.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미국, 일본 등의 산업보안 투자 비중은 10%를 웃돈다. 김현수 대한상공회의소 산업조사팀 연구원은 “국내 기업들은 기밀유출 사건이 터진 후에야 보안관리를 강화한다”며 “아직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의 대응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아무리 완벽한 보안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해도 내부자, 특히 고급 연구인력이 회사에 불만을 갖고 있다면 알짜 기술이 빠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직무발명 보상제도 등을 통해 연구성과에 대해 일정한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는 기업은 전체의 20%에도 못 미친다. 합리적인 보상이 따라주지 않으면 회사에 대한 헌신도 기대키 어렵다. 회사의 연구 성과를 가지고 직장을 옮기거나 창업하는 사례가 빈발할 수 밖에 없다. 이성훈 한국정보통신수출진흥센터 팀장은 “우수 인력에 대해 적정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산업스파이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산업보안 관련 법도 정비해야=현재 산업 기술 유출 행위를 제재할 수 있는 법규는 ‘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이다. 하지만 이 법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산업기술 유출을 막는 데는 한계를 안고 있다. 가장 큰 문제가 실효성이 낮다는 것. 이 법에 따르면 기술 유출이 일어날 경우 피해를 입은 회사가 ‘피해가 크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또한 국가연구기관에서 중요한 과학기술 정보가 빠져나가도 처벌할 근거도 없다. 기술유출을 법적으로 제재할 수 없는 사각지대가 남아있는 것이다. 더욱이 산업기밀 유출에 대한 제재 수위도 아주 낮다. 기술을 빼내다 적발돼도 1년6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집행유예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미국의 경우 산업스파이 범죄는 간첩죄로 간주해 중형으로 다스린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안’이 하루 속히 통과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법안은 적어도 법률적인 측면에서는 산업보안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법안은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해외로 매각돼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매각 자체를 금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국가적인 산업보안 시스템 필요= 우리의 경우 산업 보안 활동은 사후적인 성격이 짙다. 기술이 유출되고 난 후 수사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산업보안은 ‘예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일단 기술이 빠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현재 전자, 정보통신, 기계, 생명공학 및 화학 등 4개 분야에 걸쳐 산업보안협회가 운영되고 있지만 선진 보안관리체계를 구축하고 관련 노하우를 공유하는 데는 부족한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이 과기부, 산자부, 정통부 등 유관 부처의 정보 교류 및 협조도 취약한 것으로 지적된다. 미국의 경우 법무부, 연방수사국(FBI), 중앙정보부(CIA) 등이 범(汎)정부적인 협의체를 구성, 민간 기업들과 긴밀히 협력한다. 또한 산업보안 전문가 양성도 시급한 과제다. 전문가들이 부족하다 보니 기업들이 체계적인 산업보완 활동을 전개하는 데 한계가 있다. 미국의 경우 민간보안 단체인 산업보안협회(ASIS)를 통해 보안관련 교육을 수시로 진행하는 동시에 보안전문자격증 제도도 운영한다. 김영오 기계산업분야 산업보안협의회 간사는 “효과적인 산업보안 체계가 갖추지 않는 한 기술개발 투자는 녹슨 파이프를 통해 수돗물을 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체계적인 보안 시스템을 가동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해외에서는 어떻게? 산업 정보수집·보안 정부가 직접 챙긴다 21세기는 글로벌 경제전쟁 시대다. 국가정보기관이 자국 기업을 돕기 위해 첨단 과학기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옛 소련이 붕괴된 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요원들에게 산업정보 수집 및 산업보안 활동을 요구하자 일부 요원들은 "미국을 위해 죽을 수는 있다. 그러나 GM을 위해서라면…"이라며 거세게 반발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런 반발은 옛날 얘기일 뿐이다. 전세계 정보기관들이 과학기술 정보 수집활동을 주요한 업무로 삼고 있다. 이런 공세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나라에서 정부가 직접 나서 산업보안 활동을 펼친다. 경제력이 곧 국력이기도 하지만 첨단 정보기술(IT)이나 바이오기술(BT)의 경우 민수 및 군수용으로 동시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첨단기술 보호를 위한 법령을 꾸준히 정비하는 동시에 정부 부처들간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정교한 산업보안 시스템을 가동한다. 미국은 지난 2002년 '산업보안강화법'을 만들었다. 이 법에 따라 CIA, 법무부, 연방수사국(FBI), 국방부, 에너지부 등 유관 부처들이 모두 참여하는 '국가보안실(ONCIX)'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 정부는 테러 예방 및 첨단기술 유출 방지를 가장 중요한 보안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미국은 국내 문제에 CIA가 간여하는 것을 법으로 제한한다. 그래서 FBI가 미국 산업 보안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FBI는 전국 56개 지부에 300여명의 요원을 배치, 산업정보 보호를 전담하는 부서를 운영한다. FBI는 요원 수를 앞으로 800여명으로 증원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일본도 지난 2002년부터 산업보안을 크게 강화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영업비밀을 포함한 지적재산의 보호를 목표로 지적재산전략대상을 공표하는 한편 지적재산기본법을 제정했다. 경제산업성은 2003년 그 후속 조치로 기업의 지식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기술유출 방지지침'과 '지적재산 취득관리 지침' 등을 잇달아 제정, 강력한 산업보안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총리가 본부장을 맡는 '지적재산 전략본부'를 가동중이다. 지적재산 전략 본부는 중앙 및 지방정부, 기업, 학교 등이 첨단 과학기술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국가적인 기구다. 중국은 산업보안에 관한 한 선진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미 1993년 국가안전부(MSS) 주도로 '국가안전법'을 제정, 산업기밀 유출 행위를 엄단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2000년 '인터넷 관련 기밀보호법'을 제정, 인터넷에 흘러 다니는 정보를 검열함으로써 첨단기술 유출 가능성을 막고 있다. 러시아는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FSB)을 중심으로 산업스파이 활동을 차단한다. 특히 옛 소련이 붕괴된 후 전투기, 핵무기, 우주 개발 등에 종사해온 과학기술인력이 중요한 과학기술을 외국에 넘기는 일이 늘어나자 전담부서를 구성, 이런 전문 인력을 밀착 관리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정보기관 MI5를 통해 국내 산업 보안 활동을 펼친다.반면 영화 007 시리즈로 잘 알려진 MI6은 해외 산업정보 수집을 전담한다. 프랑스도 국토감시국(DST) 산하에 산업스파이 신고 상담소를 운영하며 산업 스파이 활동을 차단하고 있다. 이밖에 이스라엘은 정보기관 모사드를 통해 핵심 과학기술을 보호하고 있다. /특별취재팀=정구영차장·이병관·김현수·한영일·이현호·손철·이혜진·최광기자 gychu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