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나쁜 사마리아인을 위한 변명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사랑과 윤리, 인간성 회복의 대표적 사례로 성서를 통해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온다.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게 된 낯 모르는 유대인을 당시 사회 지도층이었던 제사장과 하나님 말씀에 가장 충실했다는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으나 혼혈 이민족으로 천대 받던 사마리아인이 구해줬다는 내용이다. 얼마 전 한 법원에서 착한 사마리아인 사례를 돌아보게 하는 판결이 있었다. 거리가 꽁꽁 얼어붙은 겨울 밤에 노숙인을 역사(驛舍) 밖으로 내보낸 뒤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혐의로 기소된 코레일 직원과 그곳에서 근무하는 공익근무요원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법 지킨 직원을 누가 힐난하랴 재판부는 "관련법이 역 안에서 노숙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자를 퇴거할 수 있어 노숙인을 구조할 의무가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들 두 사람에 대해 "노숙인의 죽음 앞에서 도덕적 비난은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법적으로는 무죄, 도덕적으로는 유죄라는 의미다. 코레일 직원과 공익근무요원은 나쁜 사마리아인이 됐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역사)에 들어온 불청객을 단호하게 내쳤다. 그들은 절실하게 도움을 청하는 노숙인의 손짓을 외면했다. 그리고 노숙인은 죽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일까. 코레일 직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가 법을 무시하고 노숙인을 역사 안으로 들이는 것이 옳았을까. 만약 그가 노숙인을 역사에서 쉴 수 있게 했다면 그 노숙인은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역사는 수많은 노숙인들에게 점령당했을 것이다. 역을 이용하는 어떤 한 시민이라도 이에 대해 민원을 제기한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그 직원이 져야 했을 것이다. 그도 누군가의 아들인 동시에 아버지이다. 공익근무요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동안 공익근무 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군에 강제 입대해야 했을 것이다. 공익근무요원은 소속 기업의 상관 명령을 절대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그 세계의 법이다. 이런 사정을 판사가 알았다면 그들의 도덕성을 그렇게 심하게 비난할 수 있었을까. 그 판사는 법원에 노숙인이 들어오려 할 때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을까. 판사의 감상적인 접근이 그들을 영원히 나쁜 사마리아인의 틀 속에 가둬 두지는 않을까. 속절없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코레일 직원의 매몰찬 행동을 비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선의를 베풀 경우 자신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약자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고 '마녀사냥'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판사는 그들의 도덕성을 비난하기에 앞서 노숙인을 책임지지 못한 사회안전망을 탓했어야 했다. 도덕에 기댈 것이 아니라 법이 미치지 못하는 공백에 대해 자책했어야 했다. 선행법 제정할 계기로 삼아야 실제 프랑스나 러시아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우리와 가까운 중국과 일본 등도 착한 사마리아인법(The Good Samaritan Law)을 도입했거나 유사한 법률을 시행하고 있다. 착한 행동을 도덕이 아니라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2년 강도를 만나 폭행을 당한 뒤 7시간이나 방치된 끝에 사망한 김왕규씨 사건을 계기로 착한사마리아인 운동이 이어지고 있지만 도덕성 회복 운동 차원에 머물고 있다. 선의의 응급의료에 대한 면책규정도 치료를 하다가 사고가 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수준이다.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는데도 위험한 사람을 구조하지 않을 경우 엄한 형법을 적용하는 착한 사마리아인법과는 거리가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법이 생겨야 나쁜 사마리아인에 대한 변명이 필요 없는 사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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