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리빙 앤 조이] 첫 여성 메인 뉴스 단독진행 김주하

"기자와 앵커 둘 다 포기 못해… 행복한 고생"



[리빙 앤 조이] 첫 여성 메인 뉴스 단독진행 김주하 "기자와 앵커 둘 다 포기 못해… 행복한 고생" 서은영기자 supia927@sed.co.kr 관련기사 • "重力거부" 스카이스포츠의 세계 • 스카이 스포츠 시작하려면 • 날만한 장소 • 첫 여성 메인 뉴스 단독진행 김주하 • [피부이야기] 피부미인 송선미 비결 • 10년간 흡연? 40세 넘고? 폐기능 검사는 필수! • "버스 안에서 춤·노래 한국서만 볼수 있어요" >>리빙 앤 조이 기사 더보기 텔레비전 뉴스의 주인공은 늘 남자였다. 여성앵커가 뉴스 시작과 동시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금기와도 같았다. 오프닝 멘트는 남성앵커의 몫이라는 게 모두가 묵인하는 룰이었다. 그런데 이 오래된 룰을 깬 사람이 있다. MBC 주말 뉴스데스크를 진행하고 있는 김주하(34) 앵커 겸 기자다. 김주하가 처음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2004년. 최초로 아나운서와 기자를 겸하면서 였다. 그런데 그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출산 휴가 후 복귀와 동시에 한국 뉴스 사상 최초로 메인뉴스 단독 진행을 맡았다. 지난 8월 김주하는 취재 후일담을 정리한 책(‘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을 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삶과 앵커 겸 기자로서의 성공에 대한 얘기들을 기대했지만 그녀를 만나러 가기전에 읽어 본 책의 내용은 김주하의 풀스토리가 아니라 취재기였다. 인터뷰를 하기 전 대충 그녀의 속내를 들쳐 봤으니 이제 생각과 목소리를 들어 볼 차례다. -주말 뉴스를 단독 진행 하신지도 벌써 8개월째군요. 두 사람이 진행할 때와 큰 차이가 있나요. ▦ 남자앵커가 없어졌다는 게 변화였어요. 이전까지 전 메인이 돼 본 적이 없거든요. 뉴스를 진행할 땐 항상 옆에 남자앵커가 있었죠. 나는 얹혀가면 되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 내가 직접 길을 찾아 운전을 해야 할 때가 온 거죠. 뉴스에 앵커가 둘인 이유는 속보 때문이에요. 한 명이 진행하는 사이 다른 한 명은 속보 멘트를 정리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시청자가 나만 보고 있어요. 속보가 들어오면 눈은 카메라를 보면서 머리 속으로는 속보를 정리하고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해야 하는 거죠. 처음엔 많이 힘들었지만 익숙해졌어요. 오히려 속보가 없으면 밋밋하죠. 속보 때문에 생방송을 하는거 잖아요. -주중에는 취재기자로, 주말에는 뉴스 앵커로 일하느라 쉴 틈이 없을 것 같습니다. 둘 중 하나라도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 둘 다 놓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앵커가 전체 뉴스를 파악하는 역할이라면 취재기자는 자기가 맡은 뉴스 하나를 완벽하게 알고 있잖아요. 제가 기자로 전직을 한 것도 뉴스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어요. 그래서 두 역할은 서로를 보완하는 거죠. 그날의 뉴스를 전체적으로 보면서도 제가 맡은 뉴스 만큼은 완벽하게 아는 거예요. 또 뭘 포기한다는 생각은 잘 안 하는 편이에요. 물론 스스로에게 ‘왜 사서 고생 이냐’고 질책해 본 적도 있어요. 하지만 정말 긴박하게 일을 끝내고 나면 순간 엔도르핀이 돌면서 웃음이 나와요. -왜 그렇게 인생을 힘들게 사시는 거예요. ▦ 그게 바로 우리 엄마가 제게 늘 하시는 말씀이에요. (웃음) 언론인은 단명하는 직업이라고 하잖아요. 솔직히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사람이 마음이 편해야 살 거 아닙니까? 하지만 제 스타일 상 어쩔 수 없어요. 어릴 때부터 빡빡한 스케줄을 봐야 잠이 올 정도였어요. 대학생 때도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 전까지 하루 계획표가 빼곡하게 차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했어요. 아침뉴스할 때도 그렇고 요즘도 잠을 많이 못 자지만 내가 잠 많은 건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해요. 내가 아침 뉴스할 때도 내 친구들은 녹화방송 아니냐고 우스개 소리를 하더라고요. -기자 겸 앵커로 일하면서 재미있는 일도 많을 것 같은데요. ▦ 기억에 남는 일은 많죠. 한 번은 취재를 나갔는데 하나만 더 취재하면 기사가 더 좋아질 것 같더군요. 그래서 하나만 더 취재하고 들어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날이 평일이라 9시 뉴스데스크 진행을 해야 했어요. 앵커들은 보통 오후 2시부터 준비를 시작해요. 4시 반부터 분장을 하고 6시부터 밥 먹고, 예고 멘트 쓰고 녹화를 하죠. 늦어도 7시에는 앵커 멘트를 쓰기 시작해야 하는데 오후 7시가 되도록 전 분장도 안 하고 예고는 커녕 앵커 멘트도 못 쓴 상황이었어요. 차 안에서 입술이 바짝 말랐어요. PD를 맡은 선배(뉴스데스크는 피디도 기자가 맡는다)에게 전화를 했죠. 7시 넘어 도착할 거 같은데 예고를 대신 써달라고요. 그런데 평소 차분하기로 유명한 선배가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정신 있냐. 당장 들어오지 않으면 혼날 줄 알아” 라며 화를 내시는 게 아니겠어요. 창피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죠. 그 길로 들어가 머리만 대충 빗고 예고를 휘갈겨 쓴 채 녹화를 마쳤어요. 그 날 예고는 뭐라고 말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그런데 딱 들어가보니까 그 선배가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고요. 부장, 국장, 부국장이 다 내가 평일 취재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걸 보고 나를 혼내려고 벼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 분들에게 혼나게 하느니 자기가 혼내는 게 낫겠다 싶어 그 선배가 전화통을 붙들고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신 거였어요. 들어갔더니 국장, 부국장이 오히려 나를 다독여 주더라고요. 뉴스 마치고 그 선배가 보이길래 “다 안다”며 찡긋 웃었더니 그 선배도 웃대요. 참 고마웠죠.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다니던 대학까지 옮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던 이유가 있나요. ▦ 원래 바보 같은 구석이 있어요. 하나 밖에 볼 줄 모르는 성격이죠. 왜 저를 보고 ‘경주마’라고 하겠어요. 경주마라는 건 다른 건 보지 않고 결승점만 보잖아요.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건 아니지만 그냥 다른 게 보이지 않았던 거죠. -목소리 콤플렉스가 심했다고 하시는데 목소리가 좋기만 한 걸요. ▦ 지금은 제 목소리가 익숙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걸 거예요. 처음 입사했을 때는 이상하다는 말도 들었어요. 그래서 예쁜 척 목소리를 냈죠. 톤을 높이고 잔뜩 꾸며서 목소리를 냈어요. 하지만 가짜 목소리는 곧 드러나게 마련이잖아요. 방송이 길어지면 어김없이 힘 빠진 목소리가 나왔고 어느새 원래 목소리를 내고 있더군요. 김주하의 책을 보면 김주하는 고등학교 시절 신문반 활동을 하면서 뉴스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됐다고 적었다. 밤 늦게 까지 취재를 하고 시험기간에도 신문을 만들다 보니 자연히 성적은 떨어졌지만 대신 언론인이 되겠다는 값진 꿈을 얻었다. -기자가 아닌 아나운서가 되기로 결심하셨던 이유가 뭔가요. ▦ 처음엔 물론 기자를 꿈 꿨어요. 그런데 고등학생은 신문보다 뉴스를 많이 보잖아요. 저도 텔레비전 뉴스에 관심이 많았죠. 그런데 뉴스를 보니까 기자들은 자기가 맡은 뉴스 하나만 아는데 앵커는 다 알더라고요. ‘앵커가 되면 모든 뉴스를 다 내 걸로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2004년 기자로 전직을 하신 이유는 뭔가요. ▦ 제가 꿈꾸던 앵커는 뉴스 하나하나를 깊이 있게 다 아는 거였어요. 하지만 앵커가 모든 뉴스를 다 알 지는 못 하잖아요. 어떨 땐 시청자 보다 잘 아는 게 아니라 그저 먼저 아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기자가 됐죠. 기자가 되고 가장 뿌듯했던 건 사람들이 제 출입처와 관련된 건 모두 저에게 물어본 거였어요. 가령 정통부 출입할 때는 회사 사람들이 모두 제게 휴대전화 요금제 같은 것을 물어보더군요. 그 분야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자부심이 생겼죠. -기자 전직 후 경찰서 출입(입사 직후 수습기자들은 6개월~1년간 경찰서를 돌며 사건 보고를 한다)도 하셨나요. ▦ 저더러 선택을 하라고 했어요. 그 당시 평일 뉴스데스크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 보통 오후 11시에 퇴근을 했어요. 오전 6시부터 경찰서를 돌려면 집에서 4시반에는 나와야 하고 3시반 전에는 일어나야 했죠. 또 오후 11시에 퇴근을 해도 집에 오면 뉴스 모니터링하고 가판신문 읽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오전 1시가 넘어야 잘 수 있었어요. 하지 말라는 충고도 있었죠. 그런데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기 위해 전직을 한 게 아니었잖아요. 1년간 경찰서 출입 하면서 후회 안 한건 아니에요. ‘내가 미쳤지’ 이 생각을 수도 없이 했죠. 내가 철인도 아니고 쓰러진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 얘기를 회사에 하면 못 하게 할까 봐 말도 못 하고 끙끙 앓았죠. -책을 보면 ‘얼굴이 많이 알려져 대역을 구하거나 얼굴을 가리고 취재를 해야 했다’ 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얼굴이 알려져 이로운 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 좋은 점도 물론 있죠. 일단 제보를 많이 해 줘요. 그 중엔 이상한 제보도 있는 게 사실이에요. 내게 들어온 제보 중 열의 하나는 이상한 거라고 보면 되요. 그래도 매번 10개 다 사실 확인을 해요. 김주하 앵커의 책 중 ‘나를 키운 건 8할이 손석희라는 악몽’이라는 부분이 있다. 김 앵커에게는 대선배인 손석희 교수와 함께 아침뉴스 진행을 맡으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내용이다. 군대에서도 매를 많이 맞은 후임이 나중에 혹독한 고참으로 돌변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김 앵커는 어떤 선배인지 궁금해졌다. -본인은 손석희 씨처럼 무서운 선배인가요. ▦ 그렇지 못 한 편이에요. 일단 내가 바빠서 그런 것도 있지만 예전처럼 열정을 가지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매달리는 후배들이 없어요. 그런 후배가 있다면 물론 귀찮을 수도 있지만 후배들에겐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열의가 필요할 것 같아요. 물론 요즘 친구들이 선배들의 방식을 배우는 것보다 자기들 나름의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도 좋긴 하지요. -지금까지 맡았던 부서는 어디인가요. 어느 부서가 가장 맞다고 생각하세요. ▦ 사회부, 경제부, 국제부에 있었고 지금은 문화부에 있어요. 부서마다 장단점이 있어요. 사회부는 사회의 부조리를 다 해결한다는 의협심이 불타게 하는 부서예요. 그래서 신입 기자들에게 잘 맞는 것 같아요. 경제부에서는 많이 배웠어요. 국제부는 주말 뉴스 맡으면서 발령 났는데 잠깐밖에 못 있었어요. 내근을 해야 하는데 제가 주말 뉴스 앵커 리포트 준비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었거든요. 지금 있는 문화부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보도하는 곳이에요. 이런 일은 문제를 지적하고 파헤치는 기사보다 어려운 것 같아요.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는 게 어렵잖아요. 이런 것도 기사가 되는 구나 하며 많이 배우고 있어요. -문화부에서는 어떤 분야 맡고 계신가요. ▦ 지금은 잡일을 다 맡고 있어요. 주말 뉴스 앵커리포트 아이템 잡는 걸로도 정신이 없어서 남은 걸 다 맡고 있죠. 문화부는 워낙 취재 분야가 다양해 한 사람이 하나씩 맡기보다는 다 같이 여러 개를 맡는 식이에요. 전시회도 가고 음악도 담당하고 영화 소개도 해요. -일이 바빠 아이 키우는 건 꿈도 못 꿀 것 같은데 육아는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 어머니가 봐주세요. 애한테 미안하죠. 부모들은 자식에게 생각과 가치관 같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 하잖아요. 제 경우에는 아이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 한다는 게 안타깝고 미안해요. 둘째 낳게 되면 첫째를 좀 봐줄 수 있겠죠. 물론 당장은 어렵겠지만. 요즘 들어 애 생각이 더 많이 나요. 이젠 아이가 감정 표현도 하고 엄마도 가리킬 줄 알고 하니까요. -해외에 나가 계신 동안에 남편과 양가부모께서 결혼날짜를 잡고 결혼준비를 하셨다면서요. 본인은 더 늦게 결혼할 생각이었나요. ▦ 더 늦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원래는 두 사람이 결혼할 거라는 건 다 알고 있었고 시기를 정하는 것만 남아있었죠. 근데 자꾸 소문이 나고 기사화도 되고 하니까 내가 해외출장 간 사이에 양가 부모님과 남편이 날짜를 잡고 준비를 시작하신 거죠. 부모님께 너무 고마웠죠. 결혼 준비가 굉장히 힘들다고 하잖아요. 저 대신 부모님들께서 준비를 다 해주셔서 저는 정신 차려보니 결혼해 있더군요. 솔직히 편했죠. 우리 부부는 숟가락, 냄비, 그릇 같은 것도 결혼 하고 장만했어요. 전에는 동생이 결혼준비를 하면서 저한테 몇 가지 물어보는데 하나도 대답해 줄 수가 없더군요. 해 본적이 있어야 말이죠. -최근 들어 인터뷰를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본인이 기자인데 기자에게 인터뷰 당하는 기분이 어떠세요. ▦ 사실 전 한 달에 한 번만 인터뷰를 해요. 사람이 매일 새로운 얘기가 나올 수는 없잖아요. 인터뷰 때마다 늘 같은 얘기를 하고 싶진 않기 때문에 시간 간격을 충분히 두는 거죠. 그런데 최근 책 출간하고 인터뷰 문의가 많아 응하다 보니 그 원칙도 깨졌어요. 이제부터는 다시 예전처럼 간격을 둘 생각이에요. 물론 처음엔 많이 쑥스러웠죠. 인터뷰하러 오는 기자들을 동지로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미 취재하러 오는 기자들은 저를 인터뷰 상대로만 생각하고 오시더라고요. 인터뷰를 하고 나서 기사화됐을 때 속상한 경우가 더러 있어요. 내가 한 말이 아니거나 잘못 전달돼 기사화 될 때 그렇죠. 그럴 땐 전화 해서 잘못됐다고 말하는데 “데스크가 맘대로 바꿔버렸다”는 식으로 변명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건 더 이해가 안 가요. 기사는 기자꺼 아닌가요. 자기 기사를 두고 데스크 탓을 하는 건 기자가 아니죠. 반드시 사실 확인을 재차하고 기사화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확인이 안 된 채 나간 기사 어떤 게 있었나요. ▦ 사실 그런 걸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않는 편이라 기억도 안 나요. (웃음) 김주하 앵커 약력 출생 : 1973년 7월 29일 소속 : MBC (보도국 문화팀) 학력 : 이화여자대학교 과학교육 학사 데뷔 : 1997년 MBC 입사 수상 : 2002년 한국 아나운서 앵커부문 대상 2003년 프로들이 선정한 우리 분야 최고의 앵커우먼 선정 2003년 제16회 기독교 문화대상 방송부문 수상 경력 : 2004년~ MBC 보도국 사회2부, 경제부, 국제부 기자 2007년 현재 MBC 보도국 문화팀기자 입력시간 : 2007/11/0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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