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설을 굳이 색깔로 표현하자면 잿빛이 아닌가 싶다. 세상살이가 너무 팍팍한 탓에 친지들의 얼굴에서 밝은 빛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지만 정겨운 시간을 나눌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실업ㆍ가계부채ㆍ소득감소 등 우리 경제를 누르고 있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정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안부를 묻는 인사말이 되레 고문(?)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만나는 친지마다 `취직 여부`를 묻는 통에 집 밖을 전전하는 조카나 동생의 모습이 가슴을 때렸다. 가장(家長)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ㆍ중동을 전전하며 한국경제를 부흥시켰던 과거의 산업역군은 구조조정으로 `비경제 활동인구`로 전락했다.
고통은 비단 남자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얼마 안되는 퇴직금과 그동안 어렵사리 모은 돈을 까먹는 지경이라 정성스레 제수를 챙기는 종부(宗婦)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탄식과 서로에 대한 걱정으로 연휴를 보내는 집안이 많았다. `명절 증후군`이란 말은 이제 `명절마다 곤궁과 고통에 힘겨운 친지의 모습을 확인해야 하는 상황`으로 새롭게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가족이나 친지들에 대한 염려는 이내 분노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 분노의 대상은 주로 정치권이었다. “정치인들이 `차떼기`로 돈을 먹어도 좋다. 더러운 돈을 쓰더라도 제발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 사는 걱정을 하지 않도록 정치를 하면 그래도 참을 만 한데….” “대통령이 도대체 경제에 대해 언급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기억도 안 난다. 단골 메뉴는 정치나 선거자금 이야기 아니었나.”
정부가 신년 초부터 투자활성화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거듭 다짐하고 있지만 여기에 희망을 거는 모습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총선용 `립 서비스`가 아니냐는 해석이 더 많았다. 특히 정년 연장 방침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친지들이 모이기만 하면 “정년을 60세로 연장한다는 것은 총선에서 공무원 표를 최대한 얻으려는 사탕발림 아닌가.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민간기업에서는 58세 정년을 채우기만 해도 큰 복(福)이다”고 꼬집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올 추석에도 우울한 `명절 증후군`은 반복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올 추석에는 집안 식구들끼리 이야기 꽃을 피우며 아녀자들이 음식상 차리는 게 힘들어 푸념하는 예전의 `명절 증후군`을 겪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정문재 경제부차장 timothy@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