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20년(1883년 8월6일), 전환국이 생겼다. 목적은 서양식 화폐 주조. 수요가 발생할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주전소를 세워 돈을 찍던 방식을 대신해 상설 조폐기관을 세운 것이다. 독일인 재정고문 묄렌도르프의 건의로 신설된 전환국의 당면과제는 통화가치 안정.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다며 발행한 당백전과 외척인 민씨 일족이 발행을 주도한 당오전 등 실제가치가 액면가치를 훨씬 밑도는 화폐 때문에 발생한 재정문란과 물가고를 치유하는 게 1차 과제였다. 고종은 전환국에 애정을 쏟았다.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빠듯한 형편에서 건물을 신축(1884년)하고 독일제 설비를 수입(1887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문제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는 점. 설비가 수입되고 전환국이 자리잡기까지 악화 발행의 유혹을 고종 스스로 참지 못해 전환국은 당오전은 물론 새로운 악화인 백동화까지 남발해 물가고를 더욱 부추겼다. 백동화는 조선 말 경제를 밑바닥부터 갉아 먹은 주범으로 꼽히는 악화. 액면가치는 2전5푼이었지만 실제가치는 5푼에 불과해 발행과 동시에 인플레이션이 일었다. 전환국 설치 이후 1904년 폐지될 때까지 백동화 발행액은 모두 1,674만3,522원 65전. 전체 발행액의 88%나 차지했다. 조선은 왜 부작용이 불 보듯 뻔한 백동화 발행에 매달렸을까. 황실 수입을 위해서다. 나라 경제보다 황실의 호주머니를 우선시하는 제살 깎아먹기 정책, 황실과 나라를 동일시하는 봉건적 사고는 화폐제도ㆍ재정문란에 그치지 않고 망국을 낳았다. 전환국은 결국 화폐주권을 노린 일본에 의해 폐지됐으나 반대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폐해가 컸다는 얘기다. 오욕의 역사 속에 사라진 전환국이 딱 하나 남긴 게 있다. ‘원’이라는 화폐단위가 전환국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