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1일] 면화공채

1863년 6월1일 특이한 금융상품이 선보였다. 남부연합이 채권과 면화를 연계한 ‘면화공채(Cotton Bond)’를 발행한 것. 국가의 이름으로 발행된 첫 파생금융상품이다. 면화공채의 특징은 두 가지. 남부연합 달러 대신 파운드나 프랑으로 사고 팔며 언제라도 면화로 교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면화의 교환 가격은 파운드당 6펜스. 채권 보유자는 국제시장 시세인 24펜스와의 차이만큼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상품의 의도는 한마디로 리스크 헤징(Risk Hedging). 남부연합 화폐의 가치추락에 대비하고 판세에 따라 원리금을 못 건질 것으로 판단되면 아무 때나 면화를 싼 값으로 인수해가라는 뜻이다. 화폐가치 폭락은 물론 승패의 리스크까지 줄여주는 옵션을 제시한 셈이다. 남부연합은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 면화채권을 팔았다. 표면금리 7%. 남북전쟁 이전에 발행된 국채보다 1%포인트 저렴했을 뿐이다. 옵션이 없었다면 두자릿수 금리에도 자금조달이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남부는 이 채권으로 300만파운드를 끌어 썼다. 문제는 전황. 전세가 크게 밀리며 면화공채의 인기도 시들었다. 해외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자 남부연합은 징세 확대를 시도했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대농장주들의 조세저항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자금을 마련할 길이 막히고 전투에서도 연패한 남부는 지폐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물가가 치솟을 수밖에. 전쟁기간 중 북부의 물가 상승률이 80%인 데 반해 남부는 9,000%의 물가고에 시달렸다. 전투는 물론 경제운용에서도 완벽하게 패배한 꼴이다. 노예제도 유지라는 기득권만 주장했을 뿐 납세의무를 저버리는 풍토에서 머리를 짜내 만들어낸 그럴듯한 금융상품도 금융사의 초라한 에피소드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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