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정책

[위기의 국가재정] <하> 야성 잃은 재정파수꾼

슈퍼파워 이름값 무색 기재부 '공약이행 전위대' 변질 안된다<br>부총리급 부처로 위상 높아졌지만 공약이행 위해 예산 등 여권에 밀려<br>지방자치 재정립해 재정지출 줄이고 예산이력제 도입 정치권 견제도 필요



국회예산정책처가 분석한 법안추계 비용 자료를 보면 지난해 국회에 제안된 법안 한건당 소요될 국민혈세는 1조9,040억원에 이른다. 국회의원ㆍ정부 할 것 없이 국회에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법안들이 모두 통과될 경우 재정이 얼마나 드는지 뜯어본 결과다. 분석 대상에 오른 법안 건수는 총 164건으로 이들 법안으로 요구되는 총예산은 312조2,536억원이다.

더구나 지난해 제출된 법안의 비용총추계액 중 65%가 복지 관련 정책을 다루는 국회 복지위원회와 교육과학위원회 소관 법안용이었다. 복지예산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이 같은 천문학적 재정 요구와 정면으로 싸워 나라곳간을 지켜야 하는 정부 사령탑은 기획재정부다. 기재부는 박근혜 정부 들어 부총리급 부처로 승격됐다. 또한 나라살림의 수입과 지출을 각각 맞는 세제실과 예산실 조직이 한지붕(기재부 2차관) 밑으로 개편돼 나랏돈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슈퍼파워를 낼 수 있는 부처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현정부 출범 이후 현재까지 기재부가 보여준 모습은 슈퍼파워라는 위상이 무색할 정도다. 기재부는 지난 상반기 세수확충과 불요불급한 공약의 구조조정을 약속한 뒤 5월 에 박근혜 정부의 공약이행계획(공약가계부)을 발표했다. 그러나 발표 직후 지방공약 이행계획이 빠졌다고 새누리당이 반발하자 기재부는 당초 예정에도 없던 지방공약가계부를 추가로 만들겠다며 금세 돌아섰다. 이후 기재부는 다시 사회간접자본(SOC) 삭감을 예고했으나 결국 지난달 당정협의에서 새누리당에 밀려 SOC 삭감 방침을 완화하고 말았다.

심지어 기재부 내에서조차 야성을 잃은 현재의 조직 상황을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기재부의 한 간부는 "기재부는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서도 국방예산 증액 요구에 굴하지 않았을 정도로 외풍에 몸을 굽히지 않는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겨왔다"며 "그런데 지금은 대통령의 한마디, 국회의 한마디, 여론의 한마디에 찔끔하며 고개를 숙이니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개탄했다.

실제로 기재부가 올해 내놓은 경제정책운영 방안, 세제개편안, 내년도 예산안 및 중기재정정책 등 굵직한 정책들은 모두 박근혜 정부의 공약달성을 이행하는 공약이행집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나라곳간을 지키는 파수꾼이던 기재부가 이제 정치공약 이행을 위한 '전위대'가 된 셈이다. 그 결과는 현정부 5년 내내 총 90조원에 육박하는 적자 나라살림이라는 재정정책을 초래했다.


이럴 바에야 중기재정정책이 무슨 소용이냐는 극단적 회의론마저 나온다. 중기재정정책이 임기 내 적자를 내는 현정부에는 면죄부만 제공하고 차기 정부에는 이를 흑자로 전환해야 할 족쇄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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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연구원장 등을 지낸 원윤희 서울시립대 교수는 "지금처럼 국가재정운용계획(중기재정계획)이 해를 넘길 때마다 왔다갔다하면 중기재정계획을 기반으로 나라살림을 안정적으로 꾸리기가 어려워진다"며 중기재정계획을 보다 실효성 있고 안정적으로 운영할 것을 주문했다.

재정파수꾼 역할을 기재부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이미 우리 경제의 다양성이 확대됐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따라서 기재부뿐 아니라 국회와 지방정부 등도 스스로 저지르려는 재정지출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유인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우선 지방정부에 대해서는 퇴색된 지방자치를 재정립하는 것만이 예상낭비를 막는 정석이다. 주만수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은 지자체가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으며 대부분의 예산을 받아 쓰는 구조이다 보니 지자체가 자기 돈이라는 책임감 없이 남의 돈처럼 자꾸 정부에 예산을 더 요구하는 낭비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로서는 미덥지 않겠지만 지자체가 스스로 걷은 돈으로 살림을 짜게 지방자체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그래야 지자체가 주민들로부터 세금 걷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고 낭비를 줄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치권을 견제하기 위해 일종의 '예산이력제'를 도입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정 금액이나 비율 이상의 예산을 수반하는 사업은 행정부의 정책실명제처럼 어느 정치인의 입법으로 해당 사업이 시작됐고 소관 국회 상임위원과 전문위원들은 어떤 결론을 냈으며 이것이 어떻게 조정돼 입법됐는지를 요약해 공개하자는 것이다. 기재부의 한 간부는 "행정부는 이미 정책실명제를 도입해 스스로 책임감을 높이고 있는데 입법부는 책임소재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너도나도 생색내기식으로 재정수반 법안을 제출한다"며 "예산이력제 같은 것을 도입하고 이를 시민단체 등이 공개하는 장치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민병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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