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松林 바람소리 못다한 망부가처럼

경주 안강 홍덕왕릉 "흥덕왕릉(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가면 탱고를 추고 싶다." 소설가 강석경의 '유혹'에 이끌려 찾은 왕의 무덤. 과연 소나무로 장막이 쳐진 왕릉 앞 너른 터에 융단처럼 펼쳐진 풀밭은 무도회장처럼 아늑하다. 무덤 앞에서 웬 춤타령이냐, 강씨의 산문집 '능으로 가는 길'(창작과비평사)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왕릉에 얽힌 애틋한 '사랑' 때문이다. 강씨는 책에서 사랑의 결실을 뜻하는 상징으로 '탱고'를 말하고 있다. 신라 42대 흥덕대왕은 즉위(826년) 1년만에 사랑하는 아내 장화부인을 잃는다. 원성왕(38대)의 손자인 흥덕왕은 소성왕(39대), 헌덕왕(41대)의 친동생으로 주요 벼슬을 두루 거치면서 왕을 보필하다가 50세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으니 장화부인과의 수 십년 정은 깊을 대로 깊었으리라. 짝 잃은 임금은 이후 늪처럼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는데, 그 어떤 미색으로도 그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했다고 한다. 흥덕왕은 남은 생애를 단절된 사랑에 신음하다가 죽음 이후에야 영원한 사랑을 이어갈 수 있었다. 60세에 세상을 등진 임금의 시신은 경주 북쪽 안강 땅, 장화부인의 무덤에 나란히 누었다. 삼국유사는 흥덕왕이 부인을 향한 망부가로 '앵무새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가사는 남아있지 않지만, 망부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서려있다. 신라 사신이 당나라에서 금슬 좋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그만 암놈이 갑자기 죽고 말았다. 짝 잃은 수놈의 통곡은 그칠 날이 없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운 흥덕왕이 거울을 비춰주니 앵무새는 거울 속 제 모습을 짝의 환생으로 여겨 쪼고 또 쪼아댔다. 그러나 부리가 터지도록 쪼아대도 대답이 없자, 수놈 앵무새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흥덕왕의 실화와 앵무새의 설화가 어쩌면 그리도 꼭 들어맞는지. 어쩌면 설화는 왕의 슬픔이 담긴 픽션인지도 모를 일이다. 보물처럼 소중한 '사랑의 설화'를 담고 있는 흥덕왕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철옹성처럼 가로막고 있다. 수 천 그루의 소나무들은 한결같이 구불구불,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물뱀 히드라처럼 몸체가 용트림 친다. 영원한 사랑을 추구한 대왕 부부의 지고지순한 영혼을 지키는 수호신답게 기세가 완강하다. 헤라클레스는 불사신 히드라를 꺾었지만, 흥덕왕을 지키는 소나무의 강건함은 그 무엇도 억누르지 못할 것 같다. 소나무의 기기묘묘한 비틀림 때문일까.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소나무 숲은 어엿한 관악기가 된다. 숲을 관통한 바람소리는 공명을 일으키며 절묘한 마찰음을 빚어낸다. 무덤 속 흥덕왕이 1,000년 전 못 다 부른 '망부가'를 이제서야 듣는 듯 착각을 일으킨다. 무덤 앞에는 또 하나의 수호신이 있다. 우락부락한 눈을 부릅뜬 무신상이다. 부리부리한 눈과 생김새에서 단박에 서역인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와 서역과의 문명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알게 하는 증거이다. 봉분 바로 앞의 상석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새 것으로 바꾼지 몇 년 안된 듯 반듯한 돌이다. 바꾸기 전 옛 상석은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는 믿음에 사람들이 하도 만져대서 형체가 달라질 정도로 닳았다고 한다. 그대로 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기왕 바꾸었으니, 옛 상석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소중하게 애무하길 바란다. 흥덕왕의 지극한 사랑을 닮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새 상석에도 왕의 영혼이 전해질 것으므로. '쉬~익!' 바람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온 바람의 울림이 마음을 흔든다. 엄동설한이 코 앞인데 봉분 위에는 때 아닌 들국화가 함박꽃이다. 소복이 흰 눈이라도 내렸으면. 안강= 글ㆍ사진 문성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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