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동양정치의 기본은 치산ㆍ치수가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재해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고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왕권이 위협받는 상황이고 보면 치산ㆍ치수에 심혈을 기울였던 까닭도 이해가 가는 노릇이다.
서울에는 한강을 포함해 크고 작은 하천이 35개나 흐른다. 지금 청계천(청계천)이라 불리는 개천(開川)은 한양도성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다. 개천은 자연하천이 아니라 하천을 개착(開鑿)함을 뜻한다.
한양 북쪽에는 좌청룡ㆍ우백호인 낙산과 인왕산이 각각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물길은 도성쪽으로 남류한다. 남쪽에는 안산인 남산이 버티고 있어 물길은 다시 북류해 개천에서 합수했다. 당시 개천은 도성을 양분하는 사회적 경계선이었고 한양의 중심도로나 큰 길은 모두 개천 물길을 따라 만들어졌다.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 왕조는 우기 때마다 범람하고 수해를 입는 개천에 골치를 앓았다. 더구나 개천 주위로 뻗어있는 작은 지천들도 바닥에 모래나 토사가 쌓여 조금만 비가 와도 범람하는 이른바 천정천(天井川)이 되어갔다.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태종은 수해를 걱정하는 신하들로부터 개천ㆍ개수를 건의받기도 했다.
그러나 건국 이래 왕국과 도성 축조 공사로 지친 백성들을 보며 개수공사를 주저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하륜이 태종에게 간하기를 “기쁨으로 백성을 부리고 백성을 적당한 시기에 부리는 것이 예전의 도(道)입니다. 기쁘게 하는 도리는 창고를 열어 양식을 주고 밤에는 역사를 쉬게 해 피로해서 병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라고 하자 임금을 그렇게 여기었다`고 적고 있다.
매년 반복되는 수해 때문에 고심하던 태종은 개천 개수공사를 결심하고 사업을 전담할 개천도감을 두어 1411년 11월 드디어 개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당시 관청의 토목공사는 오늘과 같은 도급제가 아니라 백성을 동원한 공사였는데 이 때 전국에서 동원된 인원만도 무려 5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당시의 개천공사는 주로 준설을 하여 하천 바닥을 낮추고 양안에는 제방을 쌓았는데 상류 장의동(3가)부터 종묘동(4가)까지는 돌붙임으로, 종묘에서 도성끝 수구문까지는 목재로, 성밖 중랑천 합수점까지는 흙으로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개수된 하천은 이제 도성민에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생활하천으로 변모하게 됐다.
당시의 개천은 일차적으로는 생활하수를 처리하는 기능을 담당했는데 도성안 사람들이 버리는 하수는 물론 일반 개숫물까지 모두 개천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개천은 또는 아낙네들의 빨래터였고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도성민이 누리는 평범한 일상과 변변치 않은 문화생활이 이 곳에서 이뤄지다보니 개천은 항상 깨끗할 리야 없었겠지만 그래도 도성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제 환생(還生)! 한양에 거주하는 도성 사람들에게 그토록 사랑을 받아왔던 개천은 600여년이 흐른 지금 서울시의 야심찬 복원계획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용틀임하고 있다. 아낙들이 찾던 빨래터는 수초가 우거진 물고기의 보금자리가 되고, 그 옛날 아이들의 놀이터는 이제 가재를 잡고 멱을 감은 또 하나의 양재천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아! 청계천이여…사람들의 사랑을 되찾아 오는데 그토록 세월이 필요했던 말인가.
<최재범(서울시 행정2부시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