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경제부가 추가적인 적대적 인수합병(M&A) 방어책을 마련하지 않겠다고 못박은 가운데 금융감독당국에 이어 한국은행마저 경영권 방어장치의 필요성을 강조해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국내 제조업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여유자금을 자사주 매입, 배당금 증액 등에 사용하면 투자 위축으로 경쟁력 악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게 한은의 입장이다. M&A 공격자와 방어자간 힘의 균형을 추구하는 게 전세계적인 추세인 만큼 우리나라 역시 국내 기간산업에 대한 방어책이나 독소조항(포이즌 필)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다루는 재경부ㆍ금융감독원과 한은의 입장이 달라 외국인 투자가들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어 정책의 일관성과 투명성 확보도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기업 설비투자보다는 지분투자 몰두=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유형자산 투자가 총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004년 66.0%에서 지난해 62.1%로, 연구개발(R&D) 투자도 같은 17.8%에서 16.2%로 떨어졌다. 반면 유가증권 투자는 16.2%에서 21.8%로 크게 늘었다. 계열사에 대한 지분투자는 급증한 반면 시설 및 R&D 투자의 증가세는 둔화됐다는 얘기다. 이는 기업들이 경영권 위협을 느끼자 계열사 지분 확대, 자사주 취득, 협력사와 지분 맞교환 등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책으로 국내 기업들간 ‘백기사(우호세력) 동맹’ 맺기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최근 KT&G는 싱가포르계 한 사모펀드가 경영 개입을 선언하자 신한지주ㆍ신한은행과 2,000억원가량의 자사주를 맞교환했다. 또 포스코와 현대중공업, 한진해운과 대한해운간 짝짓기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처럼 기업들이 지분투자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M&A 위협이 늘어나면서 경영권 유지 비용이 커졌기 때문이다. 기존의 방어수단은 자사주 취득은 비용 문제로, 고배당은 효율성 문제로 한계에 부딪히면서 지분 맞교환이 유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미 국내 증시는 직접금융시장이 아니라 ‘돈 먹는 하마’로 전락했다. 지난해 국내 상장사들이 증시를 통해 조달한 자금은 6조6,836억원이었지만 자사주 취득 5조4,538억원, 현금 배당 7조7,905억원 등 총 13조2,443억원에 이른다. ◇방어자와 공격자간 힘의 균형 필요=일본 정부는 올 5월부터 이른바 ‘삼각합병’을 허용했다. 외국기업이 일본에 설립한 자회사를 통해 현금이 아닌 외국에 있는 모회사의 지분을 주고 일본 기업을 매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0년 불황’ 탈출 이후 기업 구조조정을 더 활발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지난해 5월부터 포이즌 필, 황금주 및 복수의결권 주식 허용 등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제도도 도입했다. M&A 공격자와 방어자간 힘의 균형을 모색한 것이다. 금감원에 따르면 최근 일본에서 4,000개 상장기업 가운데 378개의 회사가 포이즌 필을 도입했다. 지난해 151개에 이어 올들어 200여개 기업이 새로 정관에 추가했다. 미국 역시 S&P500 대기업의 94%가 경영권 방어수단을 갖고 있다. 상장기업의 절반 이상은 ‘포이즌 필’을 정관에 포함하고 있다. 이철용 LG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국은 M&A 천국이지만 방어 수단도 많은 반면 유럽에서는 공격과 방어 수단을 모두 엄격하게 제한하는 등 M&A 영역에서 글로벌 스탠더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공격자와 방어자,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다는 게 각국 제도의 기본 정신”이라고 말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외자유치 과정에서 외국에 비해 경영권 공격은 권장되는 반면 방어장치는 부족하다는 게 이 부연구위원의 설명이다. ◇국가산업 보호 조항 등은 도입해야=재경부는 현재 자본의 원활한 이동이나 경제 선진화에 어긋난다며 추가 M&A 규제 도입에 불가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M&A에 대한 방어 조항 도입은 전세계적인 추세인 만큼 전향적인 자세가 요구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포이즌 필이나 국가 기간산업에 대한 규제 방안은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윤성훈 한은 국제경제팀 과장은 “미국처럼 국가안보 기업은 외국인 투자 철회가 가능하도록 하는 한편 공기업 민영화나 주요 기업의 정부 주식을 매각할 때는 영국ㆍ프랑스처럼 황금주를 보유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전세계적으로 차입매수(LBO) 방식에 의한 M&A가 피인수 기업의 고용불안, 금융시장 교란 등을 일으키고 있는 만큼 선제 대응해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신원섭 해외조사실 종합분석팀장은 “중장기적으로 해외 사모펀드의 국내 진출이 늘면서 국내 기간산업ㆍ전략산업에 대한 전략적 M&A 시도가 확대될 것”이라며 “미국 엑슨플로리오법과 같이 국가안보 또는 전략산업 보호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민간기업에 대해 황금주나 차등의결권제도 도입은 민간 연구자 사이에서도 찬반 의견이 팽팽하다. 기업주의 모럴해저드와 자본시장 발전 저해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스티븐 최 미국 뉴욕대 교수는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 주최 세미나에서 “피라미드식 출자구조를 통한 한국식 지배구조는 어떤 것보다 강력한 적대적 M&A 방어 수단”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