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7천여년 전의 것으로 알려진 라스코동굴 벽화를 보기 위해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디즈니월드의 EPCOT(Experimental Prototype Community Of Tomorrow)센터에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다. 이 라스코동굴 벽화의 인기가 날로 치솟으며 관광객들이 서는 줄이 길어져 기록이 연일 경신될 지경이다.그러나 정작 라스코동굴은 프랑스 남서부에 있다. 또 프랑스 당국은 동굴의 훼손을 막기 위해 지난 63년부터 일반에 대한 공개를 금지해오고 있다. EPCOT센터에 있는 라스코동굴 벽화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로 만들어 졌다. 선사시대의 화랑이 대화형(interactive)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현되어 디즈니월드에 전시된 것이다.
관광객들은 특수 안경인 고글과 조이스틱으로 동굴의 미로를 헤매고 다니면서 1만7천년 전의 조상들이 그린 회화에 감탄을 보낸다.
이 가상 라스코벽화는 미국 신시내티대학의 전자예술학과 벤자민 브리턴교수의 아이디어로 개발됐다. 그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겠다는 집념으로 라스코동굴 벽화를 가상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프랑스 당국에 5년간 끈질기게 요청한 끝에 가까스로 방문 허가를 받아 혼자서 동굴을 보러 들어갔다.
브리턴 교수는 비디오작가와 컴퓨터프로그래머로 팀을 구성, 동굴벽의 음영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게 하는 질감지도(Texture Map) 기법으로 라스코동굴 벽화를 3차원 가상현실로 제작했다.
그는 또 독특한 비밀차원(Secret Dimension)기법을 도입했다. 이 기법은 유령이 벽을 통과하듯 관람객이 벽을 뚫고 지나가 벽 바깥의 숲에 있는 선사시대의 짐승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인류가 만든 최초의 가상현실은 라스코동굴 벽화라고 할 수 있다. 라스코동굴의 들소, 사슴, 말 따위의 짐승들이 실물크기로 그려진 데다 상당히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이 벽화를 그린 원시인들은 벽의 요철을 절묘하게 이용하여 짐승의 근육이 울룩불룩하게 3차원 입체영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또 동굴 속으로 걸어들어가다 특정한 장소에 도착하면 어슴프레한 빛 아래 잘 보이지 않던 짐승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구성하기도 했다.
그들은 소년들이 나이가 차면 본격적인 사냥에 참가시키기 전에 어두운 동굴 속으로 보낸 뒤 벽화 속의 짐승과 맞닥뜨려 싸우게 하는 훈련을 시킨 것으로 보인다. 동굴 속에서 성인식을 올렸다고나 할까.
플라톤은 기원전 3백75년께 저술한 「국가」에서 동굴 속의 영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동굴 속에 살면서 한번도 밖으로 나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동굴 속의 모닥불이 만드는 그림자를 실물로 여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상현실 시스템은 현실에서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동굴이다. 이 동굴 속에서 언젠가 현대인들은 원시인처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영상을 현실과 구분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허두영 기자·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