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5월 8일] 오명과 최시중

지난 1981년의 일이다. 당시 마흔한살의 젊은 나이에 체신부 차관이 된 오명 전 과학기술부 장관은 체신부에 오자마자 전자교환기 국산화에 팔을 걷고 나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국민들이 집에 전화를 놓으려면 1년은 기다려야 하는 등 전화적체가 심했다. 전화를 놓겠다는 사람들은 줄을 섰는데 제대로 공급하지 못한 가장 큰 요인은 전화국 교환기 부족. 당시 전자교환기는 선진6개국만 만들 수 있는 최첨단 전자장비여서 우리나라는 연간 5,000억원이 넘는 돈을 주고 외국에서 수입해 쓸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시설투자 독려는 한계
그런데 전자교환기 연구개발(R&D) 사업은 직접적인 개발비용만도 240억원이나 소요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당시 10억원짜리 연구 프로젝트도 없던 시절에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 R&D 사업에 240억원이라는 돈을 투입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당연히 체신부 안팎의 반대가 심했다. “인도도 실패했고 브라질도 못했는데 젊은 차관이 어쩌자고 저러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 같은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국산 전자교환기인 TDX는 결국 4년 뒤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자교환기 개발 이후 전화가입이 급증하면서 1987년부터는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렸고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됐다. TDX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오 전 차관이 무작정 기술개발만 독려한 것은 아니었다. 비싼 돈을 들여 개발한다고 해도 수요가 없으면 무용지물인 법. 그는 개발된 교환기를 누가 쓸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세세하게 챙겼다. 이런 R&D 모델은 이후 반도체, CDMA 이동통신 장비 등을 개발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됐다. 비록 20여년 전의 일이지만 TDX의 사례는 현재 방송통신위원회가 추진하는 성장동력 육성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방송통신 정책을 총괄하게 된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와이브로(초고속 휴대인터넷)와 인터넷(IP) TV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최 위원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업은 좀처럼 성장궤도에 올라서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방송ㆍ통신 융합의 꽃’이라며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IPTV의 경우 지난해 11월 실시간 서비스를 시작한 지 4개월이 넘었지만 가입자는 고작 21만명에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IPTV 3사의 한달 매출은 13억원에 불과한 실정이다. 상용화 4년째를 맞은 와이브로는 사정이 더 나쁘다. 통신업계가 1조3,000억원이 넘는 돈을 쏟아 부었지만 가입자는 20만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일부에서는 와이브로가 인프라 투자비만 소모하고 사라져버린 ‘시티폰’의 전철을 밟을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의 IT 신성장동력이 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까. 소프트웨어가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볼거리, 즐길 거리가 없다는 얘기다. IPTV만 해도 스포츠 채널 같은 눈길을 끌 만한 콘텐츠가 부족해 케이블TV 등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다. 콘텐츠 활성화위한 배려 있어야
현재 국내 유무선 인터넷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어서 굳이 와이브로나 IPTV가 아니라도 언제 어디서나 웬만한 방송시청이나 정보검색이 가능한 상태다. 와이브로나 IPTV가 새로운 성장동력이 되려면 기존의 상품과는 차별화된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방통위는 오로지 시설투자만 독려하고 있다. 방통위는 우선 국내에서 와이브로 산업을 조기에 정착시켜 세계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생각이지만 와이브로를 통해 무엇을 서비스할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통신업체들이 시설투자만 하면 관련산업이 저절로 성장하리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정부가 미래 성장동력 육성에 의욕을 보이는 것은 좋지만 당초 의도했던 효과를 내려면 정부 정책의 수단을 좀 정교하게 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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