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있어서의 표현기술은 여러가지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명료하게 하기」와 「애매하게 하기」도 여기에 속한다.일상생활에서 막연하게 또는 대강대강 인식해오던 어떤 대상을 명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해놓은 문장을 대할때 우리는 감탄하게 된다. 밤어둠에 가려졌던 산천이 쾌청한 아침햇볕 속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을 대하게 될때라거나, 긴 장마끝에 맑게 갠 산천을 대할때 가슴깊은 곳으로부터 치밀어오르는 탄성과 비교할 수 있겠다. 명료하게 하기의 표현기술이 감탄을 자아내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적 언어표현능력이 부족한 데에 있을 것이다.
반대로 평소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만큼 분명하다고 생각해오던 어떤 대상을 애매한 상태로 흐려놓은 문장을 대할때도 우리는 감탄하게 된다. 물론 이 경우의 흐려놓기는 엉망을 만들어놓은 것과는 다르다. 애매하게 하기의 표현술은 깊이를 통한 다양한 의미해석을 유발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홑겹이나 단색이 틀림없다고 생각되던 것이 애매하게 하기의 표현술을 통해 여러겹이거나 여러색일 수도 있겠다는 변화된 인식의 시야를 갖게해 줄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복잡성·다의미성과 마주서게 되면서 감회에 젖는 것이다.
애매하게하기의 표현술은 인간의 언어표현능력의 근원적 결함에서도 비롯된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적인 문장가라해도 자신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변덕을 부리는 심리나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복잡미묘함을 낱낱이 명약관화하게 표현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언어학자나 문인들은 언어표현술의 한계에 도전하다 보면 절망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게 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 비유법, 상징법이며 나아가 「애매하게 만들기」 수법이다.
그런데 「애매하게 만들기」라는 언어표현술을 애용하는 부류를 손꼽으라면 문인 이외에 정치가를 우선적으로 꼽을 수가 있겠다. 정치가들도 언어를 많이 사용해야 하는 성격상 다양한 언어표현술을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노릇이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다수는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가들의 「애매하게 만들기」 표현술을 수사학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책임회피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신뢰회복이, 또 책임정치 실현이 절실한 이때에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