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김승웅 휴먼칼럼] 휴먼칼럼이라 명명한 이유

미국 기자들에겐 뭔가 다른 구석이 있다. 미 국내선 밸류제트(VALUJET)항공의 참사(慘死)때 일이다. 승객 110명을 태워 나르다 프로리다주 에버그레이드 늪에 추락, 승객 전원을 수장시킨 2년전의 끔직한 사고였다. 사고의 원인규명을 놓고 미국신문 대부분이 두달남짓 머릿기사 경쟁을 벌인 참사였다.당시 워싱턴에 근무중이던 나 역시 덩달아 사고 경위를 추적했다. 한국과 직관된 뉴스는 아니지만 현지 미국 기자들의 뜨거운 취재경쟁에 나도 몰래 데워졌기 때문이다. 군대시절 구보(驅步)대열과 부딛쳤을 때 대열에 끼기 전부터 미리 뜀질을 하는 격이다. 나의 추적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사고원인의 규명과는 직접 관계는 없지만, 사고기의 조종사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사실을 건진 것이다. 정확히 내 발로 직접 취재한 것이 아니고 당시 박건우 주미대사가 워싱턴포스트의 1면이 아닌 해설난에서, 그것도 사건발생 3주쯤 지나 기사말미에 단 한줄로 처리된걸 우연히 읽고 내게 귀뜸한 내용이었다. 사고기의 조종사가 여성이라! 우리 같으면 특종치고도 대단한 특종이 아닐 수 없다. 이웃 일본기자에게도 정신이 번쩍 들 특종임이 분명했다. 밸류제트 항공하면 미국에서 지금도 으레 싸구려 항공사로 통한다. 항공운임이 거의 절반으로 싼데다 이착륙시간과 노선변경이 잦아 안전을 중시하는 승객들은 이용을 가급적 자제하는 항공사다. 여기에 조종사마저 여성으로 밝혀진 것이다. 당연히 1면 머릿기사가 될 「깜」이 아닌가. 그런데도 미국신문은 단 한줄 기사로 약식 처리한 것이다. 이 신문이 도데체 장사를 하겠다는 건가 뭔가. 기사를 쓴 기자는 학업에 뜻이 있는 건가 없는건가. 허나 그렇지가 않았다. 곰곰히 묵상해 본즉 문제는 미국 기자에게 있지 않고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여성의 능력과 대우를 낮게 봐온 한국기자의 고질적인패러다임. 여기에 헐값 운임이라는 밸류젯트 항공의 취약점과 기자 특유의 경쟁심리가 가미돼 「여 조종사」의 등장을 사고 원인으로 속단한 것이다. 한마디로 발상(發想)의 폭력이다. 미국 기자들에게 뭔가 다른 구석이 있다는 서두이 말은 그들이 비교적 이런 발상의 폭력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는 나의 체험에서 비롯된 진단이다. 속단이나 균형을 잃은 판단과 부딛칠 때 미국 기자들은 쉬 「거친발상(WILD IMAGINATION)」으로 치부해 버린다. 단순히 여 조종사를 폄하했다거나 유년시절부터 몸에 밴 남녀 평등 때문만은 아니다. 여권(女權)단체의 빗발칠 항의나 제소, 또 그로인해 신문사에 입힐 재산상의 피해를 무서워해서도 아니다. 여성 조종사의 비행술을 열등한 것으로, 또 이를 사고원인으로 속단하려는 발상 그 자체가 폭력이기 때문이다. 발상의 폭력을 새삼 글의 소재로 정한 까닭이 있다. 지금 우리 도하 신문마다 경쟁처럼 싣고 있는 칼럼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칼럼의 소재 빈곤이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한 두편의 문화 또는 경제 칼럼을 빼고는 모든 신문이 정치 칼럼 일색이다. 그 중엔 정치 사설인지 조차 모르고 쓰여진 외마디 소리가 태반이다. 정치 얘기가 아니거나 심각하지 않으면 칼럼이 아니다. 서슬이 퍼렇게 정국을 논하는 걸 보면 여당 또는 야당 총재 얘기를 듣는 기분이다. 제발 정치 얘기 좀 그만 쓰고 한달에 단 한편, 그도 무리라면 석달에 한번 만이라도 좋으니 칼럼니스트 본인의 산 목소리(DE VIVE VOIX)가 듣고 싶다. 지난해 12월24일 워싱턴포스트의 정치 논객 리처드 코언은 90세된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이웃 사랑을 칼럼의 주제로 삼았다. 크리스머스라는 말을 단 한마디 사용치 않고 독자들에게 성탄의 의미를 맘껏 전한 칼럼이었다. 같은 정치 논객 로버트 사무엘슨도 초년병 기자로 부임후 만 30년을 지켜 본 워싱턴DC의 풍상을 「단절된 워싱턴」이라는 기행 칼럼으로 다뤄 독자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는 클린턴의 탄핵을 주목하는 국민이 전국의 32%에 불과할 뿐이라며 이 재판을 국사(國事)의 전부로 잘못 파악하는 워싱턴DC의 괴리된 정서를 질타했다. 둘 다 매주 2편의 칼럼을 워싱턴포스트에 싣고 있는 고정 칼럼니스트들이다. 이 글의 취지는 칼럼의 소재로 정치사안을 가급적 피해 온 내 변명을 늘어 놓기 위해서다. 아울러 왜 휴먼칼럼이라는 부제를 달았느냐는 몇몇 독자분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도 겸한다. <언론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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