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사설] 반갑고도 우려되는 대통령의 깨알지시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일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유치원 방과후 영어학습에서 북극 개발에 이르기까지 국정 전반의 14개 분야에 대한 구체적인 과제를 쏟아냈다. 지시 사항을 정리한 분량만도 200자 원고지 59장에 이른다. 글자 수로는 1만1,800자다. 말 그대로 깨알지시다. 사실 박 대통령에게 '깨알 같은'이라는 수식어는 처음이 아니다. 야당 대표 시절부터 정부 여당과의 협상에서 수첩에 깨알같이 적힌 논리를 펼친 적이 많다. 취임 이후 국가재정전략회의와 정부 부처 국정보고에서도 깨알지시가 이어졌다.


기본적으로 깨알지시는 긍정적인 측면을 분명히 갖고 있다. 대통령이 국정을 해박하고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 자체가 국가의 자산이다. 언론사 정치부장단과의 간담회에서 박 대통령이 보여준 국정에 대한 지식의 넓이와 깊이ㆍ자신감은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논란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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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깨알지시의 부작용이 장점을 상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석비서관회의처럼 대통령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챙긴다면 장관과 보좌진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대선과정에서 강조했던 책임총리ㆍ책임장관이 나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창조적 아이디어도 솟아날 틈이 없다. 통일부가 사실상 대북 대화제의를 하면서도 아니라고 부인하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말을 바꾼 사례는 복지부동과 눈치보기의 대표적인 본보기다. 업무보고 때도 청와대는 대화가 오가고 소통이 됐다고 강조했으나 실은 일방적인 지시만 내려갔다.

박 대통령은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민간의 생산성이 높은 비전투기능 분야를 과감하게 민간에 이양하거나 아웃소싱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한 것처럼 세부계획 수립과 실천은 장관들에게 맡겨야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으나 국무위원들과 협력ㆍ토론을 통해 정책을 결정하고 세부사항을 장관에게 맡겼던 고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도 되새길 만하다. 대통령의 모든 것을 챙기는 만기친람(萬機親覽)의 통치는 시대와 맞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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