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활자가 빽빽히 들어찬 인쇄물보다 시각을 자극하는 건 그림, 사진 그리고 영상입니다. 이목을 쉽게 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억하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서울대학교 학부생의 도서 대출 권수는 2010년 기준 34만권에서 올해 23만권(추정치)으로 32% 감소할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예전 대학생들 같으면 마르크스의 자본론, 칸트의 순수 이성비판,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명작을 독파하는 게 필수코스였죠. 그러나 요즘은 고전이나 명작은커녕 책 자체를 많이 읽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전공서적 대출률은 높아졌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그런데 살펴보니 그 동기가 단순히 공부만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수업에서 교재로 쓰는 책 값이 부담스러워 도서관에서 빌려 보거나 복사해서 보려는 학생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 만큼 서적을 소장하는 게 유익할 법도 한데 장기대출 혹은 복사본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한 대학생은 “책값이 그나마 아낄 수 있는 부분이니 그거라도 아껴보려는 거죠”라고 대답했습니다. 씁쓸한 현실이죠. 이러나 저러나 결국 책을 직접 사서 읽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분야와 범주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많은 전문가들은 스마트 미디어가 급증하면서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는 정보의 형태가 다양해진 것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빠른 시간 동안 엄청난 지식을 소화할 수 있는 데다가, 다른 콘텐츠와 함께 보기 좋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 시대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멀티태스킹’을 더욱 수월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핸드폰으로는 카톡을 하고,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보며 태블릿 PC로 게임을 한꺼번에 소화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다양한 기기와 매체를 소비하는 이유가 다양한 선택권이 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반면 도서는 철저한 집중을 요하는 매체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다른 일을 하기 힘듭니다. 하루하루가 조급한 현대인들의 감각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아날로그적 감각과 속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재미있는 실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조직심리학자들이 회사원들을 상대로 매체의 형태에 따라 기억력과 정보에 대한 만족도가 어떻게 다른지 조사한 결과 문서 매체로 인쇄된 경우에 훨씬 성과가 높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문서로 읽을 경우 성찰적 사고와 ‘반영적 사고’가 더 촉진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단순히 정보를 수용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재생성하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것이죠. 반면 스마트 미디어로 같은 콘텐츠를 읽게 되면 ‘정보의 과잉(Informaiton Overload)’이 초래될 위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너무 많은 콘텐츠가 한꺼번에 머릿속에 이입되면서 정신적으로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은 정보와 지식을 소비하는 활동 자체에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다양한 정보를 많이 그리고 빨리 얻을 수 있게 도와준다 믿어왔던 스마트기기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니 살짝 속은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일본의 철학자이자 들뢰즈 전문 연구자로 유명한 아사다 아키라 교토대학 교수는 21세기는 ‘탈주’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들뢰즈가 말한 ‘스키조프레니아’라는 말을 번역한 이 개념은 어느 한 분야나 주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유목민처럼 떠다니는 현대인들의 감성을 적확하게 표현했다고 평가받습니다. 탈주의 개념에는 분열이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정신병리 현상의 일환으로 탈주나 분열을 이야기했지만, 유목민적 매체 소비를 권하는 웹 서비스와 스마트 디바이스가 발달하면서 탈주는 불가피한 기제가 되고 있습니다. 때때로 이런 탈주는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가 넘쳐나게 하는 긍정적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머무름이 없는 벗어남은 무절제와 방황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문서 매체가 아니라 스마트 플랫폼에서 넘쳐나는 정보들이 오독, 오해로 얼룩지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습니다. 아니,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할 때도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책 안 읽는 사회에서 책 권하는 사회로 변화하길 바랍니다. 종이와 연필이 주는 그 감각을 가끔은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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