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를 넘긴 노학자는 유럽 위기 해법을 묻는 질문에 손사래부터 쳤다. 하지만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는 치열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설익은 전문가들이 유럽 위기에 대해 중구난방식으로 떠드는 전망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리나라 국제금융학계의 최고봉으로 평가 받는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촘촘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영철 고려대 석좌교수는 마침 지난달 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유로 피프티(Euro Fifty) 세미나'에 다녀온 참이었다. 이 세미나는 누리엘 루비니, 로버트 먼델 등 세계적인 경제 석학 100여명이 함께 참여해 유럽 위기를 진단하는 모임이다.
당초 이 세미나에서는 유럽 단일통화의 아버지인 먼델의 주제 발표가 예정돼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취소됐다고 한다. 박 교수는 "단일통화로 시작된 유로존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닫다 보니 할말이 없지 않았겠냐"며 "그를 만나서 물어볼 질문이 많았는데 아쉽게 됐다"고 말했다.
경제학계 원로인 박 교수는 이처럼 여전히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예전부터 학교에 있으면서도 경제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박 교수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청와대 경제수석,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한국은행법 태스크포스(TF) 위원장 등을 맡으며 한국 경제의 성장과 위기의 현장을 지켜왔다
금융연구원장 시절 스탠리 피셔 국제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 로런스 서머스 미국 재무부 부장관,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일본 대장성 차관 등과의 오랜 친분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IMF 행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런 그는 '정치의 계절'을 맡아 경제위기의 현실을 잊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걱정하고 있었다. 박 교수는 "최소한도 지금과 같은 고용 수준이나 성장률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때"라며 "차기 정부에 개혁의 리스트가 쭉 있다면 경제 성장과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개혁부터 시작하면서 나머지 문제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최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분야는 국제 통화제도 개편, 국제 금융감독 개편 등이다. 박 교수는 자신의 연구 분야에 대해 '잡다한 것'들이라고 말했지만 제목만 봐도 전혀 잡다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한국 경제는 여전히 관록과 선견지명을 갖춘 원로의 목소리에 목말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