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美 '금융화' 확산 딜레마

엔론 사태와 타이코 몰락, 억만금을 받고 기업을 카지노처럼 운영하는 최고경영자(CEO)들, 주가 사기와 투자은행들의 속임수 등으로 점철된 2002년 미국 경제의 끔찍한 초상은 하룻밤 사이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 같은 무절제는 조금씩 사그러들기는 할지언정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진전돼 온 '금융화(financialization)'가 정화작용 없이 경제 시스템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 경제는 물건을 만들어 나르는 일에서 현금과 증권을 주무르고 조작하는 일로 방향을 바꿔 왔다. 지난 90년대 중반까지 급속도로 진전된 이 같은 변화로 인해 국내총생산(GDP)과 나라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 면에서 금융-보험-부동산(FIRE) 부문은 제조 부문을 앞질렀다. 한 나라의 금융화가 이 정도로 진행될 경우 이는 하나의 체계로 자리를 잡아 쉽사리 돌이켜지지 않는 법이다. 엔론과 아서 앤더슨, 그리고 많은 대형은행들과 투자회사들의 사기 행각은 지난 30년부터 33년에 수면 위로 부상한 기업 및 금융 부문의 부정 행각과 흡사하다. 광적인 호황이 말기로 접어들면서 낡은 규정과 법의 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기술을 이용한 사기와 속임수들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법규로 2002~2004년 사이에 질서를 재확립시키는 것이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이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미국의 금융화가 너무 뿌리깊게 확산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가지 지표를 살펴보자. 지난 80년부터 2000년 사이에 주요 증시에서 거래되는 주식 물량은 대략 50배로 급증했고, 뮤추얼펀드 자산은 1,350억 달러에서 7조8,000억 달러로 뛰어 올랐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은행 계좌를 폐쇄하고 현금이나 자산을 자본시장과 주식 펀드로 옮겨 놓았다. 다우지수는 82년 여름의 775포인트에서 2000년 초 1만1,700포인트로 올라섰고, 나스닥지수도 같은 기간에 120선에서 5,000 이상으로 치솟았다. 금융 부문의 컴퓨터화도 빠른 속도로 진행돼 대출이나 수입을 증권화하는 온갖 투기 수단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금융 부문 성장의 한 요인이 됐다. 정부의 편애도 한 몫 했다. 80년대 초반 이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미 재무부, 국제통화기금(IMF) 등은 미국 및 국제 금융부문의 불안정한 부분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 왔다. 남미 채권 발행자들과 지난 87년 붕괴된 이후의 주식시장, 멕시코 페소화와 아시아 통화, Y2K의 위험에 직면한 은행 등이 모두 구제를 받았다. 국방 부문을 제외하고는 미국 경제의 다른 어떤 분야도 이 같은 정부 지원을 받은 적이 없었다. 기업 경영자들도 잔치에 뛰어 들었다. 지난 20년간 많은 경영자들이 금융에 눈을 돌려 아메리칸 캔이나 제너럴 일렉트릭 등 일부 기업은 회사 전체 또는 일부를 금융회사로 돌려 놓았다. 나머지 기업들도 분기별 수익이나 스톡옵션, 현금 거래 등 재무 실적을 기업 성공의 목표로 삼았다. 기업들의 이 같은 방향 전환은 증시를 부양하고, 그에 따라 경영진들을 살찌웠다. 결국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보아 온 것은 기업 부문의 오만과 무절제다. 하지만 'FIRE'부문이 워싱턴 정가의 최대 로비세력이자 최대 정치 자금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개혁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 전망이다. 엔론 사태에서 비롯된 나스닥 폭락이 민간부문의 워터 게이트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시장이 좀더 침체된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법 규정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정가의 로비를 물리치기에 아직은 위험 수위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현행 금융 규정에 대한 신뢰가 갈수록 약화돼 지금과 같은 높은 수준의 주가수익률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경우 시장이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나스닥 붕괴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주가수익률은 호황기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이 증시 침체기의 평균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주가는 앞으로 25~40% 가량 더 떨어질 수도 있다. 미 경제는 분명 80년대 이후 급속도로 금융화를 이뤄 왔다. 지난해 9.11 사태로 타격을 입은 것은 산업이나 농업 분야가 아닌 금융 부문이었다. 21세기 미국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새로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케빈 필립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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