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공학도에서 컴퓨터프로그래머로, 촉망받는 직장인에서 유능한 사업가로 탈바꿈을 거듭한 원종윤(元鍾胤·40) 인성정보사장을 두고 주위에서 하는 평가다.元사장이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에 입학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꿈은 졸업하고 나서 유학을 거쳐 교수나 연구원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화재사건으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됐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방공장을 겸하던 집에서 큰 불이 나 아버지가 심한 화상을 입게 됐습니다. 집안사정이 이런데 나만 살겠다고 공부를 계속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제꿈을 접고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됐습니다』
제대가 눈앞에 다가오자 취직준비를 해야 했다. 교수나 연구원 길이 막혀있었던 만큼 원자력분야에만 집착할 수 없었다. 결국 다른 길을 모색하기로 했다. 『때맞춰 현대전자에서 대대적인 취업공고를 냈는데 그중에서 눈에 확뛰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보기사업부 소프트웨어 개발팀 모집에서 전공불문이라는 문구였습니다.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원서를 냈고 합격했습니다』
처음 해보는 것인 만큼 모든 것이 생소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기술원에서 교재로 사용하던 책을 구입해 밤새 공부했고 점차 데이터커뮤니케이션분야에 대한 지식이 쌓여 갔다. 그러기를 3년. 이동안 그는 개인용컴퓨터로도 쓸수 있고 대형 IBM컴퓨터 역할도 하는 「리모트터미널 애물레이션 SW」를 3개월만에 개발하는 등 3가지 프로그램을 선보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체돼 있는 느낌이 들었고 대기업에서는 더이상 장래성이 없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나를 발전시키기 위한 그 무엇인가를 해야 했습니다』 결국 지난 87년 현대전자를 떠나 당시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가인시스템에 다시 입사했다.
여기서도 그는 불과 4년만에 유닉스 기반의 X-터미널 소프트웨어 한글판」등3개의 소프트웨어를 더 개발했다. 하지만 회사방향이 그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자 또다른 결심을 하게 된다.
『이제는 선택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축적해 놓은 노하우도 있고 제품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기회를 놓치기 전에 창업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행히 자금을 대주겠다는 투자자가 나타나 별 어려움 없이 인성정보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92년 IBM터미널 애물레이터를 주아이템으로 본격적인 정보통신기술(IT)사업에 뛰어들었다. 출근하는 시간이 아까워 회사가 이전할 때마다 집도 옮기고 휴일도 없이 하루 평균 3~4시간만 자며 일에 매달렸다. 결과는 첫해 매출 7억에 1억의 흑자를 내는 성공이었다. 『당시 수천만원대의 IBM단말기를 구입하지 않고도 국산PC에 부착하면 불과 200만~300만원대에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요가 폭발했습니다. 이후 네트워킹기술과 각종 솔루션을 개발하면서 지난해에는 매출액 482억 순익만 27억원을 내는 고성장 기업으로 자리잡게 됐습니다』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97년 극심한 경기한파로 인해 25억원의 환차손과 22억원의 매출축소를 경험했습니다. 불황은 갈수록 심해갔고 매달 3~5억원의 적자가 났습니다. 주위에서는 솔루션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元사장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증자를 통해 창투사 자금 30억원을 끌어들여 솔루션등 연구개발에 퍼부었다. 선택은 적중했다. 지난해부터 매출은 다시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고 올해 그폭은 매출 99.8% 순익 181% 증가로 뛰었다.
元사장은 올해 또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 인성을 최고의 IT전문업체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후배에게 최고의 성공모델을 만들어 주겠다는 창업때의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는 그의 다짐에 그의 도전의식을 엿볼 수 있다.
송영규기자SKO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