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사람 귀히 아는 갑오년 되기를

이규진 성장기업부장 sky@sed.co.kr


청마의 해가 밝았다. 동해바다 저 건너 불끈 솟아오르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보노라면 올 한 해 만사형통할 것 같은 최면에 빠져든다. 그 느낌처럼 굵은 땀 흘려보자고, 열심히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나지막한 속에 말이 들리는 듯하다.

새해 아침은 그러나 마냥 상쾌하지 못했다. 한 가장의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좀처럼 떨쳐내지 못해서다. 새해 벅찬 기대가 스러지고 나면 또렷하게 드러날 우리의 슬픈 자화상을 봤기 때문이다.


갑오년을 3일 앞둔 지난 28일 부산 동래구 온천동 재개발구역에서 불이 났다. 그 곳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한 남자의 시신이 있었다.

41세 김모씨. 자신의 집에서 불과 500m 떨어진 폐가에서 추위를 피해 불을 피웠다가 연기에 질식사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한다. 그는 지난달 1일 경남의 한 조선소에서 정리해고됐다.

가족들에게 실직사실을 차마 말 못했던 김씨는 평소처럼 기숙사에 있다며 폐가에서 잤다. 외동딸의 외고 학비를 꾸러 다녔다는 그는 최근 실업급여 32만원을 탔다.

32만원. 그렇다. 세찬 칼바람이 몰아치는 회사 밖으로 떠밀리면 그냥 끝인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안전망의 참담한 현주소다.

우리 주위엔 연간소득 1,068만원 이하 빈곤층 가구가 전체의 6분의1(16.5%)이나 된다. 한 달 생활비 90만원 미만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대한민국 가정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수치다.

경제 성장해도 근로자몫 계속 감소


서민층이라고 그리 형편이 나은 것은 아니다. 치솟는 전셋값에, 사교육비에 적자 가계를 꾸리는 가정이 54.8%다. 한국의 임시직 근로자 비율은 33.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3배에 가깝다. 저임금 근로자 비중은 OECD 평균 16%보다 월등히 높은 25.4%다. 이들도 직장을 잃는 순간 빈곤층으로 급전직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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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가난한 국민들이 많다 보니 내수는 빈사 상태다. 가뜩이나 OECD 평균에 비해 비중이 두 배(28.5%)나 되는 식당 주인 등 자영업자들은 죽을 맛이다. 치킨집·빵집·노래방·스프린골프장 등은 1년 뒤에 절반 미만만 살아남는다. 장사가 안되는 자영업자들은 451조원(은행권 285조원, 비은행권 166조원)의 빚을 지고 있다.

도대체 이 거대한 가난과 빚의 이유는 무엇인가.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5위, 1인당 국민소득 2만4,000달러, 무역규모 1조불, 대표기업 삼성전자 분기 이익 10조원'이라는 화려한 국가 성적표와는 달리 왜 국민들은 점점 못 사는가.

정부와 기업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성장을 못해서일까. 1997년에 비해 한국경제(명목GDP)는 8.5배 커졌다. 그러나 1990년 74.5%이던 중산층은 2010년 67.3%로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저소득층은 7.3%에서 12.2%로 늘었다.

정부와 경영자총협회 등 재계가 수십년째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한국의 궁핍은 임금 근로자 수입이 턱없이 적은 게 핵심 원인이다. 우리나라 노동소득 분배율은 2007년 61.1%에서 2012년 59.7%로 하락세다. 미국(67.3%, 이하 2011년 기준)·영국(69.3%)·

독일(66.9%)·프랑스(72.2%)에 비해 크게 낮다. 노동분배율이 낮다는 것은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근로자들에게 분배되는 몫 자체가 작다는 의미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1975~1999년 가계와 기업의 소득 증가율은 각각 8.1%와 8.2%로 비슷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휘몰아친 2006~2010년은 각각 1.7%와 18.6%로 기업소득 증가율이 11배나 높았다. 반대로 2001~2007년 연평균 3.9%이던 실질임금 상승률은 2008~2012년 -0.3%로 떨어진 상태다.

노동분배율 높여야 중산층 늘어

대한민국은 지금 가난 속으로 침몰 중이다. 양극화의 칼날에 중산층은 해체되고 있다. 그런데도 부동산 경기를 띄워 내수를 살리자는 '가진 자'의 추악한 탐욕이 도처에 넘실댄다. 정부·은행·건설업자·투기꾼들이 집을 볼모로 빚투성이 국민들에게 또다시 빚을 강요한다. 여야 정치권은 2차분배인 복지 미봉책으로 '언 발에 오줌 누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쪼그라들고 있는 노동소득 분배율을 끌어올리는 정공법만이 살길이다. 파국이 오기 전에 대승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갑오농민전쟁의 해인 갑오년의 의미를 뼛속 깊이 되새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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