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23일] <1509> 라스트 사무라이


1877년 9월24일 새벽3시55분, 일본 규슈 서남단 가고시마. 정부군 7만명이 시로야마(城山)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다. 상대는 사무라이 372명. 4만명이 거병한 지 7개월 동안 연전연패한 끝에 살아남은 마지막 반란군이었다. 반란의 배경은 조선 정벌을 둘러싼 불화. 메이지유신의 일등공신으로 정한론(征韓論)을 펼치다 시기상조를 주장한 내실파에 밀려 낙향한 사이고 다카모리를 구심점으로 사무라이에 대한 특혜 철폐, 사설학교 탄압에 불만을 품은 낭인들이 모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농민 출신 정부군의 우세한 무기와 근대식 전술에 밀렸다. 병력 차이 187대1에도 항복권유를 마다한 반란군이 부상 당한 사이고의 자결 이후 감행한 최후의 돌격은 톰 크루즈가 주연한 2003년 개봉작 '라스트 사무라이'에 녹아 있다. 세이난(西南)전쟁으로 불리는 이 반란을 끝으로 일본은 내란을 마치고 현대화 가도를 내달렸다. 정부군이 하루평균 탄약 32만2,000발, 포탄 1,000여발을 소비한 세이난전쟁은 일본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연간 세수가 4,800만엔인 상황에서 4,100만엔이 투입된 세이난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일본은 세금을 올리고 종이돈을 마구 찍어댔다. 필연적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일본에 양극화의 씨앗을 뿌렸다. 가난해진 농민은 소작농이나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한 반면 대지주 계층과 저임금을 바탕으로 산업자본가가 나타났다. 주요 철도가 개인자본으로 건설된 이유도 이 시기 재정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정한론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승리한 '온건파'는 국력이 강해지자 조선을 집어삼켰다. 강대국 일본의 밑바닥에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항거하는 정신이 깔려 있다. 명예를 중시하고 변절을 죄악시하는 풍토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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