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토요 Watch] 꽃중년 전성시대

드라마 보다 훌쩍 거리고… 홈쇼핑에 꽂혀 화장품 사고…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br>돈벌기에 내몰렸던 4050, 취미 생활로 세상 즐기고

안마의자 등 고가 상품에 자신 위해 아낌없이 투자






#1.사무실 벽에 걸린 시계가 오후6시30분을 가리킨다. 내 왼편에 앉은 팀장님은 오늘 저녁에 대학 동기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나는 오늘 저녁에 아무리 늦어도 오후7시에는 퇴근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연말이라 딱히 쌓여 있는 일거리도 없으니 조기 퇴근에 파란불이 켜진 셈이다. "박 차장님, 어제 예고편을 찾아보니까 오늘이야말로 절대 놓치면 안 될 것 같던데요."

내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있는 김 과장이 사내 메신저로 말을 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38세 총각인 그는 "연애 상대를 찾아 헤매는 것보다 브라운관을 쳐다보는 게 인류평화를 위한 이타적 결단"이라고 종종 말하며 미국과 일본·영국의 드라마까지 찾아보는 자칭 드라마 마니아다. 요새 젊은이들 사이에서 은밀히 통하는 용어로 바꾸자면 '드라마 덕후'. 나는 커서가 깜박이는 메신저 창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안 그래도 마누라가 본방 사수하자고 했어. 치킨 시켜놓겠대. 어제 새벽 1시까지 달렸으니 오늘은 일찍 가야지."


그렇다. '드라마 덕후'인 김 과장과 마찬가지로 나도 드라마에 울고 웃는 사람이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기혼에 초등학생 아이가 있는 만 43세 가장이라는 사실뿐. 회사를 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퇴근길 버스는 스마트폰 화면을 주시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시청률 조사기관인 TNmS라는 기관에서 스마트폰 이용자 1,000명을 조사해보니 프로그램에 따라 좀 다르기는 했지만 최대 29%의 사람들이 VOD 서비스를 이용한단다. 그 10명 중 3명처럼 나도 스마트폰을 꺼내 어제 부서 회식 때문에 놓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본다. 나는 왜 드라마에 빠지게 됐을까. 아내가 처음 '당신도 와서 같이 보자'고 했을 때는 언제였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매일 저녁 술을 마셔야 했던 영업에서 상대적으로 술을 적게 마시는 기획부서로 옮기고 저녁 시간이 여유로워진 이후부터인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드라마를 즐겨 본 후부터 나는 아내와의 관계가 예전보다 좋아졌다. 아이 이야기를 빼놓고 딱히 할 말이 없던 우리는 어느샌가 드라마 주인공과 그들이 대신 살아주는 환상 속 삶을 논한다. 오늘도 '마눌님'은 "자기도 남주(인공)처럼 카리스마 있게 기습 키스를 해봐"라며 현실을 이상과 가깝게 만들려 애를 쓴다. 어, 왜 이래. 당신은 전지현이 아니잖아!!

#2. 하루에 집 밥만 세 번 먹는 '삼식이'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나는 1955년생 양띠, 이제 6학년이 된다.

손에서 일을 완전히 놓기에는 아직 젊고 그렇다고 청춘을 다 바친 회사에서 살아남기에는 어려운 그런 처지다. 다행히 대기업에서 퇴직한 후 젊은 시절 쌓은 인맥과 기술로 대학 동기가 차린 회사에 터를 잡는 데 성공, 한 달에 400만원가량을 벌고 있다. 그 덕분에 가장의 의무는 다하고 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삶이 단조로워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나이 먹도록 매일 밤 술병만 기울이고 있을 수도 없고 산에 가는 것도 한 철이고 오랜 친구들과 모여도 그 얘기가 그 얘기다. 만나자마자 1시간은 자식들 이야기, 그다음 1시간은 자식의 자식들 자랑. 지겹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는 최근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홈쇼핑', 쇼호스트가 높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온종일 물건을 팔아치우는 그 경이로운 공간 말이다. 처음 시작은 등산복이었다. 속는 셈 치고 사보자고 했던 것이 뜻밖에 취향에 잘 맞았다. 딱 5년 전만 해도 퇴근해 돌아온 내게 홈쇼핑을 보던 아내가 '저거 사도 되냐'고 물으면 "아주 그냥 넋이 나갔다"며 타박하던 내가 이제는 리모컨 빨간 버튼을 누르고 앉았다. 혼자서는 백화점에서 셔츠 하나 못 고르던 내가 말이다. 등산복 다음에는 반신욕기, 그다음에는 승마운동기구, 가장 최근에는 아내와 함께 떠나는 중국 상하이 여행 상품을 홈쇼핑에서 골랐다. 돋보기까지 쓰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화면 보는 것도 귀찮고 홈쇼핑은 잘 모르겠으면 전화 걸면 상담원이 친절하게 예전 주문내역 확인해서 사이즈도 골라주고. 아무튼 아날로그 세대인 내게 딱 안성맞춤이랄까.

아내는 나의 홈쇼핑 입문을 격하게 반겼다. 처음에는 "내가 살 때는 타박하더니…"라며 눈을 흘겼지만 홈쇼핑을 즐기는 '공범'이 생겼다는 점에서 과거는 용서해주기로 했단다. 고마워, 여보. 그런데 한 달에 주문 6건은 좀 과하지 않아?


드라마에 대한 깊은 사랑을 고백한 '박 차장'과 홈쇼핑을 즐겨 찾는 '55년 양띠 남성'은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40대와 50대 남성의 모습이다. 모든 중년남성이 이들과 같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변화의 바람은 뚜렷하다. 칼럼니스트 김용섭이 쓴 '라이프트렌드 2014:그녀의 작은 사치'라는 책에서는 우리 시대 중년 남성들의 변화를 "스타일에 눈 뜬 남성"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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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벌기에 자신을 내던졌던 남성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취미를 즐기거나 기호품을 사 모으기에 나섰다는 얘기다.

무거운 정치와 경제에 대한 추상적인 논의 대신 명품 시계나 수제 양복, 자동차, 해외여행 등 자신이 직접 즐길 수 있는 것들을 화제로 삼는다는 분석도 나왔다. 트렌드에 민감한 출판 업계에서도 기존에는 젊은층을 공략한 편집이나 기사를 선보였다면 최근에는 아예 중년 남성만을 위한다는 표어를 내건 잡지까지 발간할 정도다. 꽃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즐기기 위해 노력하는 40·50대, 이른바 '꽃중년' 전성시대인 셈이다. 이에 대해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는 "40·50대 남성들이 중년에 접어들며 여성 호르몬이 증가하는 신체적 변화를 겪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라고 전제한 뒤 "회식과 음주가 줄어든데다 중년 남성들이 '여성적 취향'을 드러내도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우리 사회의 바뀐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이어 심 교수는 "주말에는 스포츠나 아웃도어 활동을 통해 체력 유지에 힘쓰는 게 가능하지만 주중 저녁에는 중년 남성들이 할 수 있는 활동이 별달리 없다는 것도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방송가와 유통 업계는 바뀐 중년 남성을 붙잡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드라마 제작의 경우 장르 혼성화를 통해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까지 부담 없이 즐기도록 하고 있다. 지난해 인기를 끈 드라마 '구가의 서'의 경우 SF와 무협·로맨스가 골고루 들어 있었고 '황금의 제국'은 재벌가라는 소재를 고부갈등이 아닌 경제적 측면에서 풀어내 남성들을 TV 앞에 끌어앉혔다. 중년 남성 시청자가 늘어나자 장르 선택뿐 아니라 배역이나 장면 구상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지상파 방송사 드라마 PD인 최모씨는 "중년 남성 시청자가 선호하는 대하사극은 현재의 정치상황에 빗대 표현하거나 스케일이 큰 전쟁 장면을 넣어 시청률을 공략한다"며 "반면 주말극은 전체 시청자를 겨냥하되 '딸바보' 남성을 고려해 귀여운 딸 배역을 무조건 섭외한다"고 설명했다.

유통 업계는 '꽃중년'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개발해 새롭게 확장된 시장을 선점하려 애쓰고 있다.

홈쇼핑 업계는 중년 남성들의 선호도가 높은 승마운동기구나 보청기 등 고가 상품을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선보이는가 하면 안마의자·흙침대 같은 고가 렌털 관련 상품의 편성비율도 늘릴 계획이다.

지난해 1월 '싸이 에너지 팩토리 맨즈 시리즈'를 단독으로 론칭했던 11번가에서는 화장품 분야에 '스페셜 기능성 케어'라는 카테고리를 개설해 중년 남성들의 구매를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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