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월가 리포트] 원유거래 손떼는 IB … '텃밭' 파생 원유상품 시장도 내줄 판

원자재 10년 호황 끝나자 투자수익 악화로 사업 포기

볼커룰 도입 등 규제도 한몫

비톨 등 중개업체 이어 메이저 정유사까지 가세

원유 선물시장 급속 잠식


월가의 투자은행(IB)들이 한 때 막대한 수익을 올렸던 원유 거래시장에서 고사 위기에 몰리고 있다. 도이체방크, JP모건 등 굴지의 대형 IB들은 '볼커 룰' 도입 등 금융 당국의 규제와 자본 건전성 강화 압력, 수익성 악화 등 삼각파고를 만나 실물 원유거래 시장에서 속속 손을 떼고 있다. 특히 원자재 중개업체에 이어 BP 등 메이저 정유업체라는 강력한 경쟁자까지 등장하면서 IB 고유의 텃밭이던 파생 원유상품 시장마저 내줄 처지로 몰리고 있다.

◇애물단지가 된 실물 원유 거래= 과거 월가 대형은행들은 원유 거래 시장에 참여해 자금 중개는 물론 저장, 파이프라인 등 관련 인프라 투자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불과 2~3년만에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지난달 세계 5대 원자재 거래업체 가운데 하나인 독일 도이체방크가 관련 사업을 사실상 포기한 게 단적인 사례다. 도이체방크는 에너지, 기초금속 등 원자재, 농산품 거래를 완전히 포기하고 관련 사업부문도 없애기로 했다.

실물 원유거래에서 손을 떼기는 미 최대 금융그룹 JP모건도 마찬가지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JP모건은 33억 달러에 이르는 원자재 실물 자산을 매각하기로 하고 매수자를 접촉 중이다. 모건스탠리 역시 원유 저장 시설, 파워 플랜트 등 실물 자산을 대폭 줄였다. 스위스계인 UBS도 지난해 귀금속을 제외한 상품 트레이딩 사업부의 문을 닫았다.

월가 IB들의 원유 거래 사업 철수는 우선 수익성 악화 때문이다. 컨설턴트업체인 코얼리션에 따르면 글로벌 10대 IB의 원자재 관련 수익은 2008년 140억달러에서 2012년 55억달러로 급감했고, 2013년에는 47억달러로 쭈그러든 것으로 추정된다.

도이체방크는 원자재 사업부문 폐쇄 이유에 대해 "10년에 걸친 원자재 호황기가 끝나면서 투자 수익률이 떨어지는 가운데 원자재 거래 포지션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 조달 비용은 갈수록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세계 주요 원자재의 종합 가격 지수인 로이터제프리 CRB지수는 20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상승해 2008년 7월 473.52로 지수 출범(1994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으나 이후 급락해 현재는 277대에서 거래되고 있다.

또 현재 대형은행들은 2015년까지 국제결제은행(BIS)이 제시한 레버리지비율(총자산 대비 자본금 비율) 3%를 맞춰야 한다. 한마디로 수익성이 악화되는 원자재 사업 지속을 위해 자본금을 더 확충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뜻이다.


글로벌 IB들이 원자재 시장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등 금융당국의 규제 칼날이 매서워지고 있는 것도 한 이유로 꼽힌다. 실제 미 정부는 JP모건에 대해 서부 전력시장 가격 조작 혐의로 지난해 7월 4억1,000만달러의 벌금과 추징금을 부과했고 법무부 차원의 전면 수사를 벌이고 있다. 나아가 미 정치권이나 연준은 월가 IB들의 실물 상품자산의 보유를 제한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관련기사



◇공룡 정유업체, 원유 선물시장도 잠식= 더 큰 문제는 과거 월가 고유의 영역이던 원유 파생거래 시장도 내줄 위기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일단 비톨, 트래피규러 등 원유 중개업체들이 위협 세력이다. 이들은 실물 원유를 중개하고 있어 거래 비용이 적고 관련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는데다 신용 제공 등의 서비스까지 패키지로 제공하며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프랑스계 중개업체인 EDF트레이딩의 경우 2012년 세전 이익이 5억 유로로 2008년 이후 60%나 늘었다. 이 회사의 코디 무어 북미 에너지거래부문 대표는 "우리 회사는 탄탄한 대차대조표와 탁월한 가격 리스크 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고객들을 유치하고 있다"고 비결을 설명했다.

리스크 관리회사인 모비우스리스크그룹의 에릭 멜빈은 "오일·천연가스 헤지 시장에서 대형은행 점유율은 50%로 떨어진 반면 과거 거의 눈에 띄지 않던 원자재 중개업체들의 비중은 40%로 늘었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BP, 로열더치쉘, 카길, 코흐 등 메이저 정유업체들도 실물 원유 거래, 차별화된 리스크 관리 등을 무기로 앞다퉈 원유 파생상품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은행들의 자기자본거래(자기자본을 이용한 투자)와 원자재 투자를 제한한 '볼커 룰'이 2015년7월부터 본격 실시되면 월가의 위축은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모비우스리스크그룹의 멜빈은 "자기자본 거래가 가능할 때는 월가가 갖고 있던 정보가 귀하게 쓰였으나 자기자본 거래가 막힐 것으로 보이면서 이 또한 쓸모없게 됐다"고 밝혔다.

BP에너지의 경우 이미 북미지역에서만 20여명의 파생거래 전문가들이 전세계 3,000여개의 원유 도매업체와 거래하고 있다. 원유 생산업체인 레드마운틴리소스의 앨런 바크스데일 회장은 "가격 하락을 대비한 파생상품을 사면서 월가보다는 BP를 선택했다"며 "BP가 원유 이송시설 등 실제 인프라를 갖고 있어 신뢰가 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카길 역시 지난달 미 휴스턴에 100여명의 전문 트레이더들이 일할 수 있는 사무실을 새로 열었다. 코흐 서플라이앤트레이딩 역시 지난해 유럽 천연가스 팀을 새로 신설하는 등 파생 원유 상품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코흐측은 "월가 은행 대다수가 단기 원유 사이클만 보는 것과 달리 장기적 관점의 투자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컨설팅업체인 그린위치의 앤디 워드는 "에너지 헤지 시장의 톱 20개 업체 가운데 지난해 처음으로 비은행권 4개사가 진입했다"며 "원유 실물 시장과 금융 시장이 따로 움직이기 어려운 만큼 파생 원유시장에서 월가 퇴조의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