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20일] 러들로 학살


1914년 4월20일 아침, 러들로(Ludlow). 콜로라도 민병대가 파업 중인 광부들을 향해 기관총을 갈겨댔다. 사망자 17명. 어린아이가 대부분이었다. ‘러들로 학살’을 야기한 강경 진압의 주인공은 록펠러. ‘자선가 록펠러’ 바로 그 사람이다. 광부들이 뭘 요구했길래 총질까지 당했을까. 단순하다. 노동조합 인정과 임금 10% 인상, 사측의 노동법규 준수가 핵심이었다. 광부들의 일당은 1달러68센트. 다른 곳보다 20% 이상 적었다. 그나마 임금도 현찰이 아니라 회사 소유의 상점에서만 쓸 수 있는 교환권으로 지급됐다. 사택인 오두막의 집세는 터무니 없이 비쌌다. 록펠러는 광부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잘라버렸다. 이때가 1913년 9월. 광부들은 바로 탄광은 물론 사택에서도 쫓겨나 탄광 부근에는 거대한 천막촌이 생겼다. 협상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겨울을 지나 6개월 넘게 이어진 농성이 잉태한 새봄의 희망은 총알과 함께 깨졌다. 광부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최종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기관총좌가 몰래 설치되고 방화가 일어났다는 점. 기관총 난사와 불길 속에서 겁에 질려 피신하지 못한 여자 2명과 어린 아이 11명이 죽었다. 법은 공평하지 않았다. 파업참가자 400명 중 332명이 체포된 반면 사측에서는 민병대 장교 한 사람만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뿐이다. 보수 논객들은 사측의 행위를 ‘산업평화를 위한 일격’이라며 치켜세웠다. 러들로 학살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쳐 노동조건이 다소 나아졌다. 러들로에 뿌려진 어린 생명들의 피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 록펠러 1세는 재산을 사회에 내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오늘날 록펠러는 ‘선행의 대명사’로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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