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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대다수 핀란드 젊은이들의 꿈은 단순했다.
세계 최대의 휴대폰 기업인 노키아에 취직해 안정적인 샐러리맨 생활을 보장받다가 은퇴 후에는 연금생활자가 돼 풍족한 노후 생활을 즐기는 것이었다. 핀란드 정부가 기업가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엔젤 투자나 벤처 창업 지원, 연구개발(R&D) 투자 등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사회 전반에 혁신과 창의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도 청년 창업은 살아나질 않았다.
노키아 취업이라는 편한 길을 놔두고 창업이라는 모험을 선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당시 노키아는 국민적인 신뢰, 우수 인재 등 핀란드의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며 승승장구했다. '핀란드는 노키아랜드'라는 말까지 나왔다.
'벤처 괴물'로 추락한 노키아
하지만 바로 지금 노키아의 추락은 참담할 정도다. 스마트폰이라는 정보기술(IT) 산업의 변화 흐름을 쫓아가지 못한 탓이다. 시장 점유율은 갈수록 급감하고 막대한 영업 적자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급기야 지난달에는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에 의해 신용등급이 정크(투자부적격) 등급인 'BB+'로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현재 생존을 위한 노키아의 몸부림은 안쓰러울 정도다. 자사의 고급 휴대폰 브랜드인 '베르투'를 매각하는 등 상당수 사업 부문을 시장에 내놓았다. 최근에는 특허료 수입을 노리고 무더기 소송에 들어가면서 '특허 괴물'로 변신한 게 아니냐는 비아냥 소리도 듣고 있다. 한때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4%, 법인세 수입의 22%, 수출의 25%를 차지하던 글로벌 기업치고는 지나치게 초라한 추락이다.
이 와중에 핀란드 경제도 거덜났다. '노키아에 좋은 것은 핀란드에도 좋다'는 구호는 거꾸로 '노키아가 망가지니 핀란드마저 망가졌다'는 교훈으로 돌아왔다. 핀란드는 유럽 경제 침체에다 노키아의 몰락까지 겹치면서 마이너스 성장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대목은 노키아가 몰락하자 핀란드에 새로운 성장 동력이 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노키아에서 구조조정을 당한 인력이나 노키아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지 못한 청년층을 중심으로 벤처 창업 열풍이 불고 정부의 각종 지원 시스템이 뒤늦게 빛을 발한 탓이다. 스마트폰 게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앵그리 버드'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새 성장 동력 만든 핀란드
스마트폰이 노키아에는 재앙을 몰고 왔지만 핀란드 벤처 산업에는 미래를 열어준 셈이다. 이를 두고 월스트리트저널 유럽판은 "노키아 몰락이 핀란드에는 이익이 되고 있다"고까지 평가했다. 앵그리 버드는 이제 국적기인 핀에어 항공기의 외벽을 장식하는 등 핀란드 경제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고 있다.
이처럼 벤처 산업으로 투자와 인력이 몰리고 노키아라는 거대 기업에 눌려있던 조선ㆍ화학 등 틈새 산업들이 발굴되면서 실업률은 지난 2010년 8.4%에서 지난해에는 7.7%로 떨어졌다. 유럽 대다수 국가가 실업률이 급등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여기서 인구가 500만여명에 불과한 핀란드와 우리나라를 단순 비교해 최근 여야 정치권 움직임처럼 대기업에 때리기에 나서자는 게 아니다. 과거 핀란드가 노키아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면 우리나라는 글로벌 기업들이 부지기수다. 싫으나 좋으나 이들 대기업들은 우리 경제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다.
다만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한 국가와 대기업의 이익은 일반적으로 같은 길을 가지만 때로는 어긋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노키아 사례는 한 국가가 과도하게 큰 1~2개 기업에 의지할 때 위기에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창의와 혁신, 인재 개발 등 경제 생태계만 건전하다면 일부 대기업이 망해 위기에 빠지더라도 한나라의 국가 경제는 복원력을 증명해낸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 성장'이라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정책 어젠다를 내세우면서도 단순히 대-중소기업의 이해관계를 이분화하는데 그칠 뿐 위기를 대비해 경제 전반의 시스템 업그레이드는 등한시하고 있는 최근 정치권의 행태는 무책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