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2월11일] <1265> 시마바라의 난

1637년 12월11일(일본력 10월25일), 시마바라(島原). 농민들이 징세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순식간에 부녀자를 포함해 3만7,00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반란으로 번졌다. 급속히 확산된 이유는 세 가지. ▦기근에도 악착같이 세금을 거두고 농번기에도 성을 쌓는다며 농부를 징발해온 다이묘(영주)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도쿠가와 막부 정권에서 밀려나 낭인으로 전락한 사무라이들의 합세 ▦박해에 신음하던 천주교도의 불만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봉기군의 주력은 천주교도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선봉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일본의 패권을 둘러싼 싸움(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 참수됐다는 점이 복수심을 낳고 잡다한 성분의 봉기군을 한데 묶었다. 옛 성곽에 여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해 3만7,000여명이 농성 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3대 쇼군 이에미쓰는 12만5,800명의 대군을 보냈다. 절대군주를 향한 집념이 그만큼 강했다. 끈질기게 항거하던 봉기군은 결국 4개월 후 패배하고 말았다. 반란의 종점은 대학살. 남녀노소 전원이 죽어나갔다. 막부는 이후 전면적인 천주교 금지령을 내렸다. 스페인령 멕시코에 상인까지 보냈던 초기의 개방정책도 쇄국령으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조선과 중국, 진압작전에 참가한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와의 통상은 법으로 금지됐다. 시마바라의 난은 세계종교사에서 ‘거룩한 순교’로 기억되는 뒤편으로 근대 일본의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일본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공자와 맹자가 이끄는 군대가 일본에 쳐들어오더라도 맞서 싸우는 게 공맹의 참 가르침’이라고 믿는 풍토까지 생겼다. 일본의 개항은 이런 바탕에서 이뤄졌다. 순교의 최대 수혜자는 종교가 아니라 민족국가 일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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