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 개운찮은 은행 수수료 인하

은행장들이 은행회관에 모인다. 서민들을 위한 지원책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한 은행장이 먼저 운을 뗀다. "올해 수익은 사상 최대지만 고객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습니다. 수익을 조금 낮춰 고객들에게 도움을 주면 어떨까요." 다른 은행장이 거든다. "좋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먼저 수수료를 낮추면 고객들의 사랑이 나중에 더욱 커져 되돌아올 겁니다." 30분 만에 전격적으로 수수료 인하를 결정한 은행장들은 밝은 표정으로 회의장을 빠져 나온다. 최근 미국의 '월가 시위'가 불거졌을 때 기자가 상상해본 장면이다. '탐욕'으로 정의된 금융권이 자발적으로 선한 의지를 발휘한다면 어떨까. 미국 월가에 불어닥친 '99%의 분노'가 한국 땅에 상륙하는 걸 어쩌면 막을 수도 있을 듯해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였다. 비난은 거세졌지만 은행권은 침묵했다. 오히려 더 비겁해졌다. 자신들은 뒤에 숨는 대신 은행연합회를 내세워 "수수료는 은행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무조건 낮추라고 하는 것은 시장질서에 위배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여론은 폭발했다. 각종 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여론이 심상치 않음을 느껴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금융 당국이 칼을 뽑았다. 은행장들과 실무자들을 수차례 불러들여 수수료를 낮추라고 요구했다. 은행들은 여론과 당국의 압박에 밀려 억지로 현금입출금기(ATM) 등의 수수료를 낮추기로 했다. 참으로 안타깝다. 꼭 이렇게 여론이 악화되고 정부가 으름장을 놓아야만 어쩔 수 없이 '따뜻한 금융'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우리나라 금융의 현주소라니. 생각의 틀을 바꿔 자신들이 먼저 나섰다면 보다 감동적인 결과를 얻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최근 기자가 만난 금융인들은 하나같이 "은행이 먼저 나서 수수료를 낮추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시장경제 체제에 맞지 않는다"거나 "전문경영인이 실적이 나빠지는 결정을 하기는 어렵다" "외국인 주주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등이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너무나 낡은 것들이라 듣기 지겨울 정도다. 철저한 시장논리에 따른 금융시스템의 모순은 이미 99%의 분노로 표출됐다. 또 은행이 고객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객은 은행을 외면할 것이다. 그러면 회장이니 행장이니 하는 자리나 주주가치 같은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국민들은 외환위기 때 혈세를 들여 은행을 살려냈다. 국민들은 이제 은행에 '인간의 얼굴'을 요구하고 있다. 은행이 답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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