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흔들리는 OPEC] 현주소와 전망

세계 최대의 카르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생사의 기로에 설 것인가. 석유시장이 생산자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영향력을 상실해 온 OPEC은 미국이 이라크에서 후세인 정권을 몰아내고 석유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킬 경우 결국 해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이라크에서의 전쟁가능성 고조에 베네수엘라 파업까지 겹쳐 국제유가가 급등하고 있지만 OPEC의 위기감은 최근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고유가는 비회원국의 생산량 증대와 대체에너지 개발을 부추겨 OPEC의 몰락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각 회원국이 지난 12일 생산량 증가를 합의하게 된 것도 이 같은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유가상승에 불안한 OPEC=베네수엘라에서의 총파업이 두 달 가까이 진행되고 이라크에서의 군사적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서 국제 유가가 2년래 최고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유가는 OPEC이 설정한 목표 가격대인 22~28달러를 훨씬 뛰어 넘어 35달러 가까운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이에 OPEC은 지난 12일 하루 원유생산 허용치를 150만 배럴 증가시켜 원유가격 안정을 도모키로 했다. 이 같은 OPEC의 노력에 비회원국인 멕시코도 동참하기로 했고, 러시아의 참여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고유가의 가장 큰 수혜자 집단인 OPEC이 석유가격 안정을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70년대 두 번의 석유파동을 겪으며 고유가가 장기적으로는 산유국에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결과다. 석유파동은 매번 세계적 경기침체를 몰고 왔고, 경기침체는 석유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켜 결국에는 유가를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 석유파동의 재발을 우려한 석유 소비국들이 신유전과 대체에너지 개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석유시장에서의 OPEC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했다. OPEC이 목표가격대를 설정하고 유가 안정을 추구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회원국간 공조의 어려움=유가 안정을 위한 OPEC의 노력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유가 안정을 통한 수요확대라는 장기적 목표에는 각 회원국이 동의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이해 관계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이 인구가 적고 매장량이 많은 국가는 저유가에 따른 일시적 고통을 이겨낼 여유를 갖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고 매장량이 적은 국가에는 이 같은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회원간의 입장차와 이로 인한 조정의 실패는 소수 공급자의 시장 지배를 위한 결합인 카르텔에서는 언제나 나타날 수 있다. 이른바 `무임승차자의 문제(Free rider problem)`라고도 불리는 이 같은 현상은 카르텔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한다. 요금을 지불하지 않고 살짝 숨어서 버스를 타는 승객처럼 다른 회원 몰래 이득을 추구하는 행위가 나타나면 카르텔 전체의 이익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가격 유지를 위해 OPEC이 설정한 생산 할당량을 각 회원국이 지키지 않는 것은 `무임승차`의 대표적 예이다. 다른 회원국 몰래 생산 쿼터 이상으로 생산하는 국가는 이익을 얻지만, 이 같은 초과 생산은 결국 유가 하락을 초래하여 전 회원국의 이익을 줄이게 된다. 회원국의 생산할당량 위반이 자주 발생하면서 OPEC의 신뢰성과 영향력은 약화돼 왔다. ▲새로운 카르텔 출현 가능성=미국이 이라크 공격 후 현지의 유전을 장악하게 되면 OPEC의 영향력은 더욱 위축되리라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콜린 파월 미 국방장관은 이와 관련 "이라크 석유는 이라크 국민의 것"이라고 선언했으나, 미국이 이라크 석유산업 장악을 통해 국제석유시장에서 영향력을 늘이려 할 것이라는 전망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영국 언론들에 따르면 런던주재 반후세인 단체인 이라크국립의회는 지난 해 10월부터 미국의 주요 석유회사와 포스트 후세인 시대에 관한 논의를 벌여 오고 있어, 일종의 `음모론`도 퍼져 나가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또 포스트 후세인 이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석유수출국으로 부상하면 OPEC은 자연히 영향력을 상실하고 해체수순을 밟게 될 것이란 전망도 제기하고 있다. 반면 OPEC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증가는 회원국 간의 단합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각 회원국의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어서 카르텔이 깨질 우려가 높아지면 오히려 회원국 간의 공조가 쉬워질 수도 있다는 것. 이 달 중순에 합의된 OPEC의 생산량 쿼터가 지켜질 것이라는 예상은 이 같은 상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전쟁 위협이 제거되고 세계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면 석유에 대한 수요도 다시 증가, OPEC이 안정을 되찾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또 OPEC 카르텔이 해체된다고 해도 석유시장이 반드시 경쟁체제로 진입하는 것은 아니다. OPEC을 대체할 새로운 카르텔이 출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석유시장은 카르텔이 나타나기에 적절한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석유 순소비국인데 반해 석유 수출국은 20개에 미치지 못해, 소비자의 수에 비해 공급자의 수가 훨씬 작다. 또 새로운 유전의 개발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서 신규 진입도 용이하지 않고 석유를 대신할 수 있는 마땅한 대체상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트 후세인 시대에 미국 주도의 새로운 카르텔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대한(경제학박사) dki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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