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진실위가 밝힌 김형욱 납치·살해 재구성

1979년 9월 어느 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 전 중정부장이 프랑스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주(駐)프랑스 중정 거점장이던 이상열 공사에게 김 전 부장 살해를 은밀히 지시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의 최고책임자로부터 직접 중대임무를 부여받은 이 공사는 9월말 파리에 머물고 있던 5∼6명의 중정 연수생들을 자택으로 불러살해 가담자 물색에 들어갔다. 이 공사는 여기서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 문제야"라고 이들을 질책하며정의감을 부추기는 한편, 북한 관련 보고서를 제출토록 해 누가 적임자인 지 판단했다. 신현진(가명)과 이만수(가명)라는 두 젊은이가 그의 눈에 들었다. 10월 1일. 이 공사는 비밀리에 귀국해 김 중정부장을 만나 김형욱 납치.살해에 대한 구체적인 공작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이 공사는 김형욱을 살해할 도구로 쓰기 위해 소련제 소음 권총과 독침을김 중정부장으로부터 넘겨받았다. 다시 파리로 건너 온 이 공사는 자신이 점찍은 신현진, 이만수를 시내 모 카페로 조용히 불러내 "김형욱이 곧 파리로 온다.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이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에서 탕진하고 있고, 국가기밀을 마구 폭로하고 있다. 그냥 놔둬서는 안된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넌지시 운을 떼었다. 중정 직원들은 김 전 부장을 국가를 배신한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터라 이 공사의 말은 이들의 애국심에 불을 지폈다. 며칠 뒤 이 공사는 더욱 미더웠던 신현진을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푸케 카페로몰래 호출했다. "자네에게 부여할 임무가 있네. 일단 임무를 전달받고 나면 자네에게는 선택의여지가 없네. 이 일은 자네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 김재규 부장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는데 자네가 적극 해 줬으면 좋겠군". "목표가 김형욱이죠?". 임무를 직감한 신현진은 "어려움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 전 부장 살해를 위해 추가적인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신현진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구권 출신의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미화 10만달러라는 거액을 제시하며 살해 음모에 가담할 것을 약속받았다. 신현진은 같이 임무를 수행할 이만수를 이들 외국인 친구들에게 소개시켜 주며친분을 쌓도록 하는 한편, 파리 시내의 바뇰레 벼룩시장에서 칼과 노끈 등을 구입하는 등 김형욱을 납치.살해하기 위한 준비를 갖춰갔다. 드디어 살해 당일인 1979년 10월 7일. "김형욱으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왔어. 거절하려다가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사람을 소개 시켜 주기로 하고 만나기로 했다네". 이 공사로부터 다급한 전화 받은 신현진은 이 공사에게로 달려갔다. "두 시간 뒤 샹젤리제 거리로 김형욱을 오라고 했어. 오늘 처치해야 하니 일꾼들을 어서 부르게". 신현진은 즉각 이만수와 3국인 친구 2명을 샹젤리제 거리로 불렀다. 이들 5명은이 공사가 몰고나온 관용차인 `푸조 604' 안에서 살해 계획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이만수는 미화 10만달러가 든 돈가방을 들고 개선문 근처 호텔방으로, 나머지 4명은김형욱을 만나러 리도 극장 인근으로 차를 몰았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형욱은 카지노에서 며칠 밤을 샌 듯 초췌한 모습이었고 술 까지 마신 듯 취기까지 감돌았다. 이 공사는 제3국인 2명을 돈을 빌려줄 사람이라고 속이고 김 전 부장을 자신이 앉아있던 조수석에 태운 뒤 자리를 떴다. 그들을 태운 차가 전조등을 밝힌 채 어둑어둑해진 파리시내를 뚫고 외곽 순환도로를 건너가던 찰나였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3국인 중 한 명의 주먹이 김 전 부장의 머리를 강하게 가격했고, 김 전 부장은 이내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승용차는 유유이 파리 시내를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작은 숲속에 도착했다. 신현진은 차에서 대기하고 3국인 친구 2명이 실신한 김 전 부장을 끌고 50m 가량 떨어진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은 김 전 부장을 내려놓은 뒤 주저없이 방아쇠를7번 당겼고, 그 것으로 끝이었다. 이들은 급한 마음에 주검을 낙엽으로만 감춘 뒤 김 전 부장의 바바리코트에 여권, 지갑, 시계를 싸서 벨트로 묶어 차에서 대기 중이던 신현진에게 건넸다. "잘했어". 신현진은 이들에게 한마디를 던진 뒤 곧장 이만수가 기다리고 있던호텔로 이동해 10만달러가 든 가방을 3국인 친구들에게 전하며 "내일 중으로 프랑스를 떠나라"고 종용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 공사는 신현진에게 "수고했다"고 어깨를 두드렸고, 수거해왔던 여권과 지갑을 건네주며 "철저히 인멸한 즉시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신현진은 돌아오는 길에 김 전 부장의 시계는 세느강에 던졌고, 바바리코트와 벨트는 가위로 잘게 썰어 자신이 살던 하숙집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사흘후인 10월 10일. 귀국한 신현진이 `그림(살해경과)에 대해서는 신군한테 들으십시오'라는 이 공사의 보고문을 김재규 부장에게 보여주자 그의 얼굴은 환해졌다. "수고했어. 잘했어. 우리가 그런 놈을 그냥 놔두면 우리 조직은 뭐야?". 살해에 사용한 권총을 분실했다고 하자 김 중정부장은 "괜찮아. 소련제니까 발견돼도 오히려 북한이 의심받게 될 거니 문제없어"라며 오히려 현금 300만원과 20만원씩이 든 봉투 두 개씩을 두 손에 쥐어주었다. "근무하고 싶은 데가 어딘가. 정책연구실에서 근무하는 게 어떤가. 내 직속기관이야". 신현진을 신뢰하는 듯한 말을 건네며 김 중정부장은 즉시 비서실장을 불러 "신군을 정책연구실로 발령내라"고 지시했다. "집은 어디야. 앞으로 장가도 가려면 집이 있어야 겠구만. 한 40∼50평이면 되겠나. 알아보고 전화하게". 김형욱 전 부장 살해사건은 중정의 조직적인 개입속에 이렇게 막을 내렸다. (서울=연합뉴스) 이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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