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우주여행 후의 우주인 인생은?

국가 영웅 되기도 하지만 우주여행 이후 전혀 다른 인생 살기도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선발이 시작될 때부터 세간에서는 우주인이 ‘대박’과도 같은 인생전환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최초’라는 이름이 우리나라 우주개발사에 남는다는 명예는 물론 그 권위에 따르는 대중적 인기를 이용해 사회적 경력이 크게 부상하고, 광고 모델이나 저술 등을 통한 돈벌이도 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우주를 다녀온 뒤의 인생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우주를 다녀온 470여명, 그 중에서도 최초의 기록을 가진 몇몇 우주인들의 인생이 그랬다. 전 세계 우주인 중 몇몇은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는가 하면 일부는 정신세계와 영적인 탐구에 빠지기도 했다. 우주인 후보들은 역사적 영예나 그저 우주에 가고 싶다는 열망에 빠져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우주에 다녀온 뒤 그들의 인생은 전혀 다르게 엇갈리기도 한다. 국가 영웅이 된 우주인 우주여행 후 영웅으로 추앙받은 대표적 인물은 인류 최초의 우주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새긴 유리 가가린일 것이다. 러시아의 공군 대위였던 가가린은 1961년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08분 동안 우주에 머무르며 “지구는 푸르다”는 인상 깊은 한마디를 남겼다. 그는 우주여행 후 소령으로 특진했고, 러시아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키가 157㎝ 밖에 안 되는 단신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가가린은 단 한 번의 우주여행 후 다시는 우주에서 푸른 지구를 내려다보지 못했다. 우주여행 후 귀를 다쳐 우주여행의 기회가 없었고, 불과 7년 뒤인 1968년 비행훈련 중 제트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이씨가 우주인 훈련을 받았던 모스크바 인근의 ‘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에 남아 있다. 지난 1995년. 가가린과 함께 훈련을 받았지만 가가린보다 늦게 우주인이 된 러시아의 티토프는 35년 동안 담아두었던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자신의 비행 성적이 가가린보다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잘생긴 가가린이 최종 우주인으로 선택됐다는 것. 가가린과 같이 국가 영웅으로 떠오른 또 다른 사람으로 중국의 양리웨이를 꼽을 수 있다. 지난 2003년 양리웨이가 선저우(神舟) 5호를 타고 중국 최초로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오자 중국 정부는 그를 ‘위대한 중화의 화신’으로 추켜세웠다. 중국 정부는 양리웨이가 유인우주개발의 장을 연 데 이어 달 탐사 프로젝트 등으로 이어지는 우주개발사업에 대한 국민적 자긍심을 이끌어 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현재 우주인을 양성하는 중국 우주인과학연구훈련센터의 부주임으로 일하고 있는데, 앞으로 이루어질 유인우주선 프로젝트에 계속 참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영예와 인생은 별개 가가린은 러시아에게는 영웅이었지만 미국에는 충격을 안겨준 사람이기도 했다. 1957년 러시아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궤도에 쏘아 올린데 이어 1961년에는 가가린이 유인우주선을 통해 세계 최초의 우주여행에 성공하자 미국은 패닉상태에 빠진다. 우주개발뿐 아니라 과학기술 전반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해 진 것. 미국은 이후 달 탐사 프로젝트에 착수하는 등 치열한 우주경쟁에 돌입하는데, 그 결과 탄생한 미국의 영웅이 바로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이다. 그는 1969년 “이것은 한 인간의 작은 발자국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달에 첫 발을 내딛었다. 암스트롱의 이름은 가가린과 마찬가지로 국적을 초월해 인류 도전정신의 화신으로 역사에 전해지고 있다. 암스트롱과 함께 달에 착륙해 암석 채취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버즈 올드린은 티토프보다 훨씬 억울한 케이스. ‘간발의 차이’로 ‘최초의 달 착륙 우주인’의 이름을 암스트롱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첫 발자국을 놓고 두 사람이 벌인 신경전은 적지 않았다. 당시 달 여행을 떠난 아폴로 11호에는 암스트롱과 올드린,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가 타고 있었다. 콜린스는 두 사람이 달에 착륙해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사령선인 콜롬비아에 남아있어야 했다. 즉 선장인 암스트롱과 승무원인 올드린이 착륙선인 이글호에 옮겨 타고 달에 착륙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 통상 우주선에서 외부로 나갈 임무가 있을 경우에는 선장이 우주선에 남고 승무원이 외부 활동을 담당한다. 이 같은 관행에 따라 올드린은 자신이 달에 첫발을 디딜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선장에게 영예가 돌아가도록 임무가 조정되자 올드린은 미 항공우주국(NASA)의 상관을 찾아가 로비 아닌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달 여행 후 두 사람의 인생은 또 한 번 엇갈린다. 달에 다녀온 뒤 암스트롱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우주개발의 전도사로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발히 대중 활동을 했던 인물은 올드린이었다. 암스트롱은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했고, 달 여행 2년 뒤인 1971년 은퇴해 신시네티 항공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뉴욕에 있는 기업인 AIL 시스템스의 회장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명성에 비해선 조용한 삶을 지냈다. 두 사람과 함께 아폴로 11호에 탔지만 착륙은 못하고 달 궤도만 돌다가 돌아온 콜린스는 조종사에서 은퇴한 후 워싱턴에 있는 우주항공박물관장과 국무차관보 등을 지냈다. 우여곡절의 우주인 일본의 1호 우주인 탄생과 그 이후의 이야기도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처럼 우여곡절이 있다. 1985년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는 외국의 우주시설을 이용해 자국의 우주인을 보낸다는 계획 아래 조종사로만 제한하지 않고 우주인 후보를 선발했다. 그 중 한 명이 공대 교수 출신인 모리 마모루다. 하지만 가장 먼저 우주에 오른 일본인은 방송기자인 아키야마 도요히로다. 그의 소속 방송사인 TBS는 1990년 개국 40주년을 맞아 JAXA의 우주인 배출에 앞서 자사 기자를 우주에 보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TBS는 1990년 50억엔이라는 거액을 들여 아키야마 기자를 미르 우주정거장에 보내 우주 생중계를 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그는 9일간 미르 우주정거장에 머무르며 일본 최초의 우주인이자 세계 최초의 우주 특파원으로 리포트와 수면실험 등을 수행했다. 더구나 이 행운은 당초 후보였던 기쿠치 료코가 탑승 5일 전 복막염을 앓아 긴급히 우주인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날아들었다. 모리 마모루는 그보다 늦은 1992년 국제우주정거장에 올라 각종 과학실험을 벌였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1호 우주인이라는 역사적 명예를 놓친 아쉬운 우주인이 아니라 국민 사이에 더 유명한 1호 우주인으로 대접받고 있다. 아키야마의 경우 한차례의 방송 이벤트로 끝나고 말았지만 모리는 일본 정부가 오랜 준비와 훈련 끝에 배출한 우주인으로 공식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우주 홍보활동을 하도록 후원했다. 이 결과 그는 사실상 일본 최초의 우주인으로 통하고 있다. 그는 이후에도 한 번 더 우주여행을 다녀왔고 현재 일본 과학미래관의 관장을 지내고 있다. 결국 우주인 배출을 한차례의 이벤트로 보느냐, 아니면 국가가 장기적으로 추진하는 우주개발의 비전을 갖고 하느냐 여부가 우주인의 인생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1991년 영국 최초의 우주인이 된 여성 헬렌 셔먼도 아키야마처럼 다소 잊혀진 우주인으로 취급받는다. 과자회사의 연구원이었던 셔먼은 우리나라와 같은 우주인 공모에서 선정됐다. 1만3,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우주인으로 선발돼 우주여행을 다녀온 것. 우주여행 후 명예기사 작위를 받았고, 대학교수가 되는 등 그녀의 인생은 화려하게 업그레이드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셔먼은 자신이 우주홍보 대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자임했음에도 정부가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처음에는 대중강연 등을 활발히 다녔지만 개인적으로 모든 것을 해야 했던 그녀의 활동은 곧 잠잠해졌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 우주인들은 우주에 다녀온 뒤 국가적 영웅으로 대우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명성을 타고 장관이나 국회의원 등 정관계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도 적지 않다. 프랑스 최초의 우주인인 클로디 에뉴레는 우주여행 이후 우리나라의 교육과학기술부에 해당하는 연구기술부 장관에까지 올랐다. 신경학자인 에뉴레는 1985년 프랑스 우주사업 참여자 모집에서 1,000명 중 7명의 최종 후보에 뽑혔다. 그는 1996년 러시아의 미르 우주정거장에 탑승, 프랑스 최초의 우주인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연구기술부 장관으로 2004년 방한했을 때 오명 당시 과학기술 부총리에게 자신의 우주여행 사진을 선물로 전달하는 등 우주여행 경험을 외교적으로도 십분 활용했다. 미국 최초의 우주인으로 꼽히는 존 글렌도 영웅적 인기를 등에 업고 상원 의원을 네 번이나 지냈다. 글렌은 1962년 ‘프렌드십 7호’를 타고 4시간 55분 동안 지구를 세 바퀴 도는 우주여행을 통해 러시아에 뒤졌던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시켰다.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1964년 대령 제대 후 1974년 정계에 진출했다. 그가 4선 상원의원으로 성공적인 정치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케네디 일가와의 친분도 있었지만 ‘존 글렌 신화’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국민의 지지도 크게 한몫 했다. 그는 우주여행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1998년 77세의 나이로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탑승, 최고령 우주비행사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우주여행을 다녀온 뒤 극단적으로 인생이 바뀐 사람들도 있다. 아폴로 14호를 타고 달에 다녀온 미국의 우주인 에드가 미첼은 우주여행 후 인간 초능력을 연구하는 사설 연구소를 세워 초과학의 영역으로 발을 디뎠다. 광활하고 경이로운 우주에 대한 경험이 인간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충격을 전달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이소연씨의 신분과 임무는 현재 이소연씨의 정식 신분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선임 연구원이다. 일단은 우주여행 경험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과학 홍보대사로서 활동하는 것이 이씨에게 공식적으로 부여된 임무다. 지구 적응을 위한 회복기간을 거친 뒤 귀국한 이씨는 당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될 전망이다. 그의 첫 번째 공식 행사는 5월 초 ‘국제 유인 우주기술 심포지엄’에서 우주비행 활동 보고식을 겸한 발표를 하는 것이다. 또 6월 초에는 국제우주정거장에서 퍼포먼스를 벌였던 유엔기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하기 위해 유엔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씨와 함께 우주 나들이를 하고 온 유엔기는 유엔 외기권사무국에 영구 전시된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수행한 각종 우주과학 실험에 대한 마무리 작업도 남아있다. 이씨는 실험결과와 우주비행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공식 보고서 외에 우주여행 경험을 국민에게 전달할 도서도 저술할 계획이다. 항공우주연구원에는 이미 출판사들의 출판 의뢰가 접수돼 있는 상태다. 또한 과학 홍보대사로서 우주과학과 관련한 강연, 인터뷰 등이 이어질 전망이다. 장기적으로는 이 같은 대중 활동 외에 일상적으로 수행할 업무가 주어질 필요가 있다. 이씨는 우주여행 전부터 “우주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공학도로서의 전공을 살려 연구자의 길을 걷겠다”는 의사를 누누이 밝혀왔다. 이에 따라 항공우주연구원은 이씨와 예비후보인 고산씨에게 훈련과 우주여행 경험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유인우주인 관련 업무를 맡긴다는 계획이다. 구체적으로 러시아, 미국 등 우주인 배출사업을 수행한 국가들과의 국제협력 업무, 국제우주정거장에서의 우주실험 계획 수립 등에 참여토록 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씨는 자신의 대중성을 이용해 큰돈을 벌수는 없을까. 이미 항공우주연구원에는 이씨를 모델로 하는 각종 CF 제의가 들어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항공우주연구원은 비영리적인 과학 홍보활동에 대해서는 적극 지원한다는 원칙을 세워놓았지만 개인적인 수익사업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물론 이씨는 언제든지 항공우주연구원을 나와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하고 수익사업을 포함한 개인 활동을 벌일 자유가 있다. 이 경우에는 과학 홍보대사로서 최소한의 의무만 수행하면 된다. 하지만 평소 연구자의 경력을 원했고, 한국의 우주개발에 씨앗이 되겠다고 밝혀온 이씨가 당장 연구원을 그만두고 전혀 다른 인생을 선택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정 후보에서 탑승 한 달 전 예비후보로 교체된 고씨 역시 이씨와 마찬가지로 항공우주연구원 선임 연구원으로서 유인우주개발 관련 분야의 업무와 과학 홍보대사 역할을 맡게 된다. 고씨는 국제우주정거장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똑 같은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자신의 전공인 인공지능과 연계된 유인우주개발 연구에 참여를 희망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정부가 외국의 우주시설을 이용해서라도 유인우주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한다면 고씨는 차기 우주인 후보가 될 것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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