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6일] 요한 베허

군주들은 그를 반겼다. 아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궁정 물리학자이자 의대 교수, 연금술사, 만국공통어 발명자, 직물업자였던 그의 이름은 요한 베허(Johann Becher). 17세기를 풍미하며 경제학과 화학에서도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베허의 인생역정은 어려서부터 험난했다. 1635년 5월6일 독일 스파이어 지방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찍이 부친을 여의는 통에 13세부터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 꾸려나갔다. 소년가장은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한편 독학으로 연금술과 의학을 공부해 22세에는 마인츠대학 의학교수 자리를 따냈다. 베허는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다. 30대 초반에는 뮌헨과 오스트리아 빈에서 궁정의사, 상업학교 교수로 지내며 직물공장과 누에ㆍ생사공장도 운영했다. 라인강과 다브뉴강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을 추진한 것도 이 무렵이다. 아이디어는 끊임없이 나왔다. 영구적으로 작동하는 동력기관을 설계하고 사금 채취법도 개발해냈다. 네덜란드 의회가 ‘해변의 모래를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그에게 자금을 지원한 적도 있다. 베허의 이름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분야는 화학. 저서 ‘지하의 물질’에서 그는 연소성ㆍ광택 등을 기준 삼아 흙을 세 가지로 나눴다. 특히 기름성분이 많은 흙에는 ‘플로지스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황이나 기름 등 쉽게 타는 물질에는 플로지스톤이 포함돼 있다는 그의 주장은 오류가 증빙된 18세기 후반까지 100여년 동안 화학의 기본원리로 받아들여졌었다. 각국의 궁정에서 머물던 베허는 군주들의 경제 개인교사 노릇도 맡아 ‘한 사람이 소비하면 다른 사람은 얻는다’라는 중상주의를 퍼뜨렸다. 애덤 스미스의 등장으로 중상주의는 생명을 잃었지만 오늘날에도 ‘보호무역’이라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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