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17일] 흥선대원군

[오늘의 경제소사/1월17일] 흥선대원군 권홍우 편집위원 ‘시정잡배와 다름없던’ 흥선군 이하응이 권력을 잡았다. 1864년 1월17일(음력 1863년 12월9일), ‘임금의 살아 있는 부친’은 섭정 자리에 올랐다. 세도정치의 폭정에 허덕이던 민초들에게 흥선대원군은 구세주였다. 서원을 철폐해 양반의 임의징세권을 박탈하고, 호포(戶布)제를 실시해 양반에게도 군역을 부담시킨 결과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갓과 도포며 담뱃대의 길이를 줄여 사치와 낭비를 억제한 점도 박수를 받았다. 세제ㆍ세정 혁신을 골자로 한 개혁의 약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재정운용을 악화(惡貨) 발행에 의존한 탓이다. 집권 3년차에 발행한 당백전(當百錢)은 조선의 경제기반을 흔들었다. 당백전 발행 총액은 모두 1,600만냥. 명목가치와 실제가치간 차이가 20배에 달하던 화폐발행 이익(seigniorage)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 중건에 주로 들어갔다. 외세에 맞설 군비증강에도 허덕이던 형편에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와 화폐 남발은 물가가 6배나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1년여 만에 통용 금지된 당백전을 대신한 것은 2,400만냥이 들어온 청전(淸錢). 조선의 시장경제도 하나둘 청나라 상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민씨 정권도 한몫 보탰다. 화폐발행 차익을 노리고 1883년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했지만 민간인은 물론 일본인까지 위조대열에 끼어드는 통에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해졌다. 조선의 경제는 결국 무너졌다. ‘수출 가능 품목이라고는 소가죽과 쌀, 사람 머리털, 전복 껍데기뿐이다.’ 미국 푸트 전권공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1883년)의 일부분이다. 돈의 왜곡된 궤적은 굴욕의 역사를 낳았다. 조선이 겪은 ‘재정수요 증가-화폐 남발-경제 혼란’의 귀착점은 망국이었다. 입력시간 : 2006/01/1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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