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방선거 날이다. 선거는 현대 간접민주주의제도하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정치 참여의 한 방법이다. 앞으로 4년 동안 우리들의 이익을 대변할 대리인을 뽑는 선거는 우리의 인감도장을 대신 사용할 사람을 뽑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천 과정의 비리, 새로운 후보들의 등장과 이미지 중심의 선거운동, 정치인에 대한 테러와 집권당의 읍소작전 등 선거에 대한 뉴스는 많았지만 정작 시민들의 선거에 대한 열기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이미 판세가 기울어진 듯한 선거전의 양상이 시민들의 투표 참여 의지를 저하시키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이번 선거는 역대 지방선거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지방선거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이슈는 없고 중앙정치의 대리전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98년 지방선거에서는 IMF 외환위기에 대한 책임론과 여소야대 정국의 정계 개편 논의가 주요 쟁점이었고, 2002년 지방선거는 국민의 정부에 대한 국정운영 평가라는 여야간의 공방과 함께 대통령선거를 앞둔 대선 후보들간의 전초전 양상으로 변질됐다.
이번 선거에서도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은 ‘지방 권력을 심판하자’고 하고 야당인 한나라당은 ‘현정권에 대한 심판’을 주장하고 있다. 지방선거에서 지방은 없는 것이다. 시민단체 일부에서 후보자들의 공약을 검증하는 메니페스토 운동을 통해 정책선거를 지향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지방선거의 의미를 살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집권당의 어떤 의원은 지방선거를 중앙정치의 중간 평가로 삼는 것은 지방자치의 본질을 왜곡하는 문제이며 유권자가 정당이 아닌 인물 중심의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방선거를 중앙정치의 대리전으로 만들고 지방정치를 중앙정치에 예속시켜온 것은 바로 중앙정치권이며 여기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국회는 지난해 여야 합의로 지방자치 전문가들과 지방정치인들이 주장해왔던 정당 공천 폐지 주장은 무시한 채 오히려 기초의원까지 정당 공천을 확대했고 중대선거구제와 지방의원 유급제를 도입했다. 실질적인 목적은 여야 모두 지방에 중앙 정당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였다.
시민들의 정당 참여가 매우 낮고 특정 지역을 독점적 지지기반으로 해 정당이 존재하고 있는 현재의 지역주의 정치구조에서 해당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당의 공천은 곧 당선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 공천 범위의 확대가 공천 과정의 부패를 양산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더욱이 급여까지 받는 지방의원에 대해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고 비례대표제를 확대함으로써 중앙정치권은 지방자치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다.
후보자의 공천 방식도 2002년부터 도입됐던 상향식 공천제도인 경선은 오히려 축소됐고 각 정당은 당선 가능성을 우선시해 여론조사와 소위 전략 공천을 실시함으로써 당원과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 기회는 제한됐다. 그나마 경선이 실시되는 지역에서도 해당 지역 국회의원들의 과도한 영향력으로 인해 참다운 경선의 이미지는 상당히 퇴색됐다.
늘어난 후보자 수와 비민주적인 공천, 그로 인한 공천 과정의 부패, 그리고 중앙정치권의 이슈가 지배하는 선거 과정 등은 유권자들로 하여금 누가 제대로 된 후보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권자는 결국 후보자의 능력이나 정책 공약의 내용보다는 피상적 이미지와 지역적으로 관계 있는 정당 후보들에게 획일적으로 투표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중앙정치권은 결과적으로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감을 증대시키고 지역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시민들의 올바른 선택뿐이다. 시민들의 현명한 선택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