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4일] <1361> 브레다 선언

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4월4일] 브레다 선언 권홍우 편집위원 1660년 4월4일, 네덜란드 남부 도시 브레다. 망명 중인 찰스2세가 영국 의회에 편지를 보냈다. ‘짐은 누구든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노라. 또한 세금과 법령 등의 문제는 의회에서 결정해주기 바라노라.’ ‘브레다 선언’으로 불린 이 편지는 영국인들을 열광시켰다. 내전과 국왕의 참수형, 공화정과 크롬웰의 독재정치를 거치는 동안의 혼란과 사분오열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왕정으로 되돌아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터에 적법한 왕위계승자가 자애롭고 관대한 입장을 밝혀왔기 때문이다. 고무된 의회는 찰스2세를 영국 국왕이라고 선포했다. 아버지인 찰스1세가 의회군에게 처형(1649년)된 뒤 스코틀랜드로 피신,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배를 맛보고 망명을 택한 지 9년 만에 찰스2세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왕정복고가 이뤄진 것이다. 찰스2세는 브레다 선언을 준수했을까. 그렇지 않다. 부왕의 처형에 관련된 13명을 골라내 참수형을 내렸다. 왕정을 폐지했던 크롬웰을 무덤에서 파내 사체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다. 핍박을 못 이긴 청교도는 아메리카로 대거 떠났다.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음에도 찰스2세에 대한 영국인들의 평가는 후한 편이다. 항해조례 강화, 휘그ㆍ토리당의 양당제 시작, 순도 높은 은화 제작에 따른 파운드화의 신뢰도 향상 등이 그의 치세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대목은 화합을 중시했다는 점. 국교(영국 성공회)와 마찰을 피하기 위해 임종(55세ㆍ1685년) 직전에야 자신의 신앙이 가톨릭이라는 사실을 겨우 밝혔다.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관용이라는 골격만큼은 유지했기에 국왕 자신도 나라도 건사할 수 있었던 셈이다. 통치자의 관용과 편협은 국운을 가른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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