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이헌재 부총리 사퇴] 공직생활 영욕 거듭

野人으로 돌아간 '개혁 전도사'<br>1979년 '율산사태' 연루 20년간 공직 떠나<br>DJ 눈에 띄어 초대 금융감독위원장 발탁 영예<br>2000년 재경부장관 영전후 8개월만에 낙마

이헌재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현존하는 대한민국 경제관료 가운데 최고의 천재로 꼽힌다. ‘개혁의 전도사’ ‘구조조정의 화타’ ‘시장경제의 마지막 파수꾼’ 등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다닐 정도로 국내 금융시장뿐 아니라 기업들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참여정부 들어서는 ‘성장론의 보루’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국내보다 해외 투자가들의 막강한 신임을 받으면서 “대한민국은 믿지 못해도 이헌재는 믿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영욕(榮辱)이란 말이 그처럼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다. 부총리까지 올랐다고는 하지만 그의 관료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물러나게 된 이유가 부동산 투기 의혹이었듯이 이 부총리에게 ‘아름다운 퇴장’은 없었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거쳐 이 부총리가 공직에 입문한 것은 지난 69년. 행정고시(6회)에 수석으로 합격한 뒤 재무부 이재국(현 금융정책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장한 이 부총리는 당시 김용환 장관의 눈에 띄어 이재과장과 재정금융심의관 등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특히 이재과장 시절에는 직접 대통령에게 현안보고를 해 ‘장관급 과장’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1972년 8월3일 기준으로 일체의 기업사채를 동결한 긴급경제 조치, 즉 ‘8ㆍ3 사태 동결’은 하위 공무원 시절 그가 만든 회심작으로 회자된다. 침체일로를 걷던 경제에 강력한 각성제를 투입한 것. 이 부총리에게 첫번째 시련이 닥친 것은 재정금융심의관으로 재직하던 79년. 이른바 ‘율산사태’에 특혜금융 시비로 연루되면서 그의 비운의 인생역정은 시작됐다. 공직을 물러난 이 부총리는 이후 20년간의 야인생황에 들어갔다. ‘야인 이헌재’라는 닉네임이 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관직을 그만둔 이 부총리는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 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했다. 경기고 선배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만난 것도 이때다. 이 부총리는 김 전 회장의 주선으로 ㈜대우 상무, 대우반도체 전무 등을 거쳤고 국내 첫 신용평가회사인 한국신용평가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서근우 금융연구원 연구위원과 이성규 국민은행 부행장도 한신평 사장 당시 정운찬 서울대 교수로부터 소개를 받아 기용한 인물들이다. 초야에 묻혀 있던 이 부총리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국민의 정부’가 탄생할 때. 이 부총리는 젊은 시절 그를 기용했던 김용환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의 부름을 받아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에 복귀한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눈에 들어 98년 4월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에 발탁됐고 금감위원장으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며 ‘한국의 금융황제’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이어 2000년 1월 재경부 장관으로 영전한 이 부총리는 또 한번의 비운을 맞는다. 재경부 장관에 취임한 뒤 2ㆍ8 대우채환매, 금융시장 불안, 채권시가평가제, 현대 유동성 위기, 금융파업 등에 대한 대응을 실질적으로 주도했으나 당시 4월 총선 이후 공적자금 추가 조성에 대한 희생양으로 취임 8개월도 채 안돼 옷을 벗었다. 이 부총리는 당시 구조조정과 개혁에 탄력을 붙이려 했지만 4월 총선 때문에 취임 후 허송세월을 보내야 했고 그의 개혁성향 때문에 ‘표’가 떨어진다는 정치권의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뒤 극심한 경제침체의 소방수로 지난해 2월 경제수장 자리에 다시 오른 이 부총리는 취임 1년이 조금 넘어 또다시 불명예 퇴직이라는 아픔을 겪게 됐다. 이번에는 정치권과 청와대 개혁세력들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고 수차례 퇴임 위기를 넘기며 경기를 회복 국면으로 이끌어냈다는 평을 들었으나 결국 사임사에서 밝힌 것처럼 ‘제 부덕의 소치’라는 말로 공직생활을 마감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부총리는 평소 기자들에게 “원래 건달이었고 다시 건달신분으로 되돌아가는데 뭐가 걱정이냐”는 말을 자주 던지곤 했다. 금감위원장 시절 기업ㆍ금융구조조정으로 인기를 구가하던 당시 주변에서 치켜세우는 발언을 할 때면 “물러날 때 침이나 뱉지 말아주시오”라는 말로 응수하곤 했다. 관가의 한 고위 간부는 “‘영원한 야인’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이 부총리에게 적어도 침을 뱉는 행위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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