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0월16일]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침략의 원흉. 그가 재임했던 3년간 대한제국은 껍질만 남았다. 화폐개혁은 민족 자본을 붕괴시키고 재정지출은 일제 식민진출을 위한 기본시설 건설에 쓰여졌다. 그는 누구일까. 이토 히로부미? 아니다. 이토보다 더하면 더했으면서도 잊혀져가는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다. 탁지부(재경부) 고문이라는 직위를 갖고도 그는 전권을 휘둘렀다. 고종 황제의 내탕금 지출까지 간섭했다. 불평등 계약에 의해서다. 기록을 보자. ‘한국 정부는 재정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메가타의 동의와 가인(加印ㆍ결재)을 거칠 것…(중략)…계약은 해지할 수 없음.’ 1904년 10월16일자 일본 외교문서의 일부다. 대한제국은 어쩌자고 이런 불평등 계약을 맺었을까.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의 강압 탓이다. 대한제국이 그에게 지급한 월급은 금화 800엔. 관사비 월 100엔, 일본 출장시 교통비ㆍ실비 외에 300엔 등 활동비는 따로 내줬다. 관찰사 월급이 40원(1원≒1엔), 군수가 28원이던 시절이다. 대장성 주세국장(국세청장 상당) 출신인 메가타(당시 52세)의 역할은 식민진출을 위한 정지 작업. 대한제국의 세금과 외국 빚으로 식민지화를 위한 기초를 닦았다. 차관정치가 시작된 1907년 고문직을 마쳤을 때 일제는 그에게 남작 작위를 내렸다. 반면 조선의 경제는 철저하게 일본에 종속적인 위치로 떨어졌다. 망국 전야의 경제식민지화가 메가타 탓뿐일까. 그렇지 않다. 국가의 등불이 꺼지는 와중에서도 백성을 짜내 연 300~1,000원의 뒷돈을 거두는 지방관과 일제에 빌붙던 고관대작이 즐비했으니까. 망각이 무서운 것은 역사의 반복을 낳기 때문이다. 대일 무역적자는 날로 쌓이고 내부 불협화음도 과거와 닮았다. 북한의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한 경제건설에 참여할 기회도 놓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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